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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테마] : 주류 구조사학의 틈새에 끼어든 미시사와 일상사
[출판 테마] : 주류 구조사학의 틈새에 끼어든 미시사와 일상사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9.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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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4 12:48:46
지금은 그 열기가 조금 잠잠해졌지만, 얼마 전까지 서점은 ‘역사책들’로 가득 찼다. 주인공은 한국사와 서양사 아닌, 시간을 다룬 역사가 아닌, ‘사물’의 역사들이다. 하도 많아서 일일이 세기가 어려울 정도다. ‘얼굴의 역사’… ‘이혼의 역사’와 ‘키스의 역사’도 한 몫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죽음의 역사’가 빠질 리 없다. 소재는 다양하지만 언뜻 봐도 ‘~의 역사’라는 제목을 유행처럼 단 혐의를 지우기는 어렵다. 놀랍게도 이 책들은 대개 2000년부터 올해까지, 3년 안에 쏟아져 나온 책들이다.

일상사, 미시사, 혹은 문화사라는 이름을 단 이 책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일상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는 않다. 작은 것, 하찮은 것, 사소한 것,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온 일상에 눈 돌리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의 역사’류의 책들은 미시사나 일상사의 범주와 ‘일맥상통’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미시사와 일상사의 거죽을 입었을 뿐이다. 학문으로서 미시사와 일상사는 역사학의 한 방법론이고, 유행하는 책들은 ‘특정한 주제에 대해 백과전서식으로 엮어놓은 것’이다. 역사책이라기보다는 교양서에 가깝다는 말이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양산되는 책들은 정보가 많고 학제간 연결이 긴밀해서 ‘박학다식한 교양’을 추구하는 독자들의 수요에 맞춘 책들이 대부분이다. 본격적인 학문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 구체적 성과를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미시사와 일상사를 다룬 본격 서적에는 무엇이 있을까. ‘치즈와 구더기’, ‘고양이 대학살’, ‘미시사란 무엇인가’, ‘미시사와 거시사’, ‘일상사란 무엇인가’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미시사와 일상사는 아직 역사학의 주류는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역사학의 한 방법론인 미시사와 일상사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미시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펴냈고, 우리나라의 미시사 분야를 개척해왔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곽차섭 부산대 교수(사학)는 미시사와 일상사를 일컬어 한 마디로 “인간의 살냄새 나는 역사”라고 정의한다. “지금까지의 사학이 전체 역사가 어떤 큰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를 다룬 ‘구조사학’이었다면 미시사와 일상사는 그 큰 구조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다. 구조사학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산과 들의 지형을 그려냈다면, 미시사와 일상사는 그 들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작은 리얼리티를 그려내는 것”이라고 곽 교수는 밝히고 있다. 즉, “미시사는 구조사가 밝힐 수 없는 부분을 밝히는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미시사와 거시사’를 번역한 백승종 서강대 교수(사학)는 덧붙인 논문에서 “미시적 역사란 현미경을 통해서 동식물의 세포를 확대시켜 보는 것과 같은 연구 작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듯, 미시사는 지금까지 왕족 중심, 귀족 중심, 승자 중심의 거대한 역사에서 노비, 하층계급, 과부의 작은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시사와 일상사의 뼈대를 이루는 원리는 바로 ‘실명의 역사’라는 점.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학)는 이런 미시사 연구에 대해 “작은 것이 있고 난 다음에 큰 것이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신을 대체하고, 절대자를 대체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면, 미시사와 일상사는 역사를 신의 위치에서 끌어내려 ‘실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학계의 좋은 현상 가운데 하나다”라고 진단한다. 즉, 미시사와 일상사는 지금의 역사학이 한층 심화되고 진보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일상사와 미시사 연구가 이미 107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용어 자체도 미시사는 이태리, 일상사는 독일, 문화사는 영·미에서 발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6년 이화여대에서 처음으로 심포지엄이 열렸으니, 본격적인 연구는 채 10년도 되지 않은 셈이다. 곽차섭 교수는 우리나라에 미시사 연구자가 적은 이유로 1970, 80년대의 사회상을 꼽는다. 독재시대에는 ‘참’이냐 ‘거짓’이냐가 일상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고, 1980년대 초 학자들이 소개한 ‘사회사’ 연구에 학계가 매몰된 것도 한 원인이라는 시각이다.

‘자칫 소재주의에 매몰되지 않은가’라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서도 미시사 연구자들은 할 말이 있다. 소재주의에 매몰될 수 있는 위험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것 때문에 미시사 자체가 폄하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하물며 소재주의라도, 제대로 된 소재를 찾은 적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구조사학과 미시사가 부딪쳐야 할 지점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논쟁’을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출판계의 유행을 타고 번진 미시사와 일상사 열풍은 이제 학계의 본격적인 논쟁을 기다리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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