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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로한 시대와 ‘열정의 공동체’
이 피로한 시대와 ‘열정의 공동체’
  • 교수신문
  • 승인 2013.05.2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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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독일어권의 탁월한 작가 페터 한트케는 『피로에 대한 시론(Versuch ueber die Muedigkeit)』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의 한 장면을 상기시킨다. 피로한 상태에서 오히려 거리를 두려는 남자 캐리 그랜트를 취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가만 좀 있어. 피로한 남자와 술취한 여자는 좋은 한 짝이잖아 !” 이어서 그는 같은 페이지에 역시 “피로한 여자에게 매번 적시에 나타나 자신의 품에 떨어지게 하는 늘 피로한 주인공”으로 돈 주앙을 재해석한다. 이러한 피로의 에로티시즘의 예들에서 한트케가 주목하는 것은 피로의 한계지점에 도달한 인간이 서로에게 열리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어떤 기묘한 순간이다. 이 책은 치열한 경쟁 속에 살면서 좋은 인간관계는 점점 잃어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아 보인다. 피로를 에로스의 원리이자 공동체 형성의 원리로 바라보는 이 독특한 관점은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거의 한트케의 피로이론에 할당되고 있는데, 피로한 우리사회의 단면을 반영하듯 아직까지 상당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우리 부모세대가 전쟁 ‘속’에 살아왔다면, 우리세대는 전쟁‘처럼’ 살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는 업적을 강요하는 사회의 멍에를 짊어지고 밤마다 지친 병사처럼 피로하다. 물론 그렇다고 술취한 아내들과 애인들이 언제나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한트케 역시 자신과 타자가 벽을 허무는 피로의 순간을 전쟁과 자연재해와 같은 긴급한 예외상황의 끝에 나타나는 특이한 경험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완벽한 한 짝이 되기 위해 부부와 연인 사이의 오랜 다툼과 어려운 길들을 걷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힘든 일을 마친 저녁처럼, 어려운 싸움을 끝낸 귀가길처럼, 신나는 놀이를 마친 지친 아이들처럼 그 공백같은 한 순간 너와 나의 벽은 걷힌다. 그래서 ‘우리’가 형성되는 이 사회성을 지금 한국사회는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바쁜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힘든지, 그리고 그 ‘무엇’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어떤 자동화된 시스템 속에서 ‘그저’ 바쁘고, ‘그저’ 힘들다. 이유 없는 바로 ‘그것’, 그러나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인해 우리는 늘 피로하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은 근대 유럽의 지성사적 전통 속에 자주 발견된다. 사실상 유럽의 근대는 일의 윤리와 함께 무위의 윤리를 동시에 발전시켜왔다. 피로의 에로티시즘을 역설하는 한트케에게서 18세기 ‘無爲’의 낭만주의 전통을 곳곳에서 감지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내에서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는 서구근대와 낭만주의 전통을 이 자리에서 새로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트케는 유럽의 근대가 내장하고 있는 자기비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그 자기비판의 전통은 부르주아 사회는 와해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한편 그 사회가 일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혁명적으로 전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무위의 낭만주의 전통에서는 부르주아 사회는 피로에 지쳐 전복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한트케의 피로의 이념은 그런 사회가 만드는 보상 없는 피로감을 서로 어루만져줄 어떤 새로운 ‘사회’ 혹은 ‘공동체’를 요구하는 데 핵심이 있다. 그리고 피로의 끝에서 그 사회는 저절로 오게 돼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피로한 내게 술취한 그대가 늘 반가운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피로의 정점에서 내가 나인지 그대인지 모르는 혁명의 순간처럼 말이다. 이 순간은 니체가 예견한 것처럼 인간을 원자화하는 부르주아 개인주의가 해체되는 엑스타시스(Ex-stasis)의 순간이며, 벤야민이 탈무드에서 간파한 것과 같이 예외가 상례가 되는 극단적인 피로시대에 이뤄지는 공주의 혼례이며, 한트케가 말하듯 피로의 에로티시즘이 우리를 새로 연결시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열정의 공동체’는 지난한 피로를 댓가로 온다.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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