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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학술장’ 학술대회
‘권력과 학술장’ 학술대회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5.27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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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한국여성학 제도화의 전사기(1960~82), 지식생산의 동학-장소·사람·프로젝트」 발표에서 김영선 연세대 HK연구교수(사회학)는 장소, 인적 네트워크, 프로젝트를 중심 키워드로 삼아, 여성학의 제도화 이전 시기를 ‘여성문제연구회’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이화여대의 ‘한국여성연구소’를 중심으로 살폈다. 당대 한국 여성문제를 다뤘던 세 단체가 공통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활동에 필요한 공간과 물적 자원의 확보였는데, 김 교수는 국제 부분에서 상당부분을 지원받았음을 분석해냈다.

여성운동단체이면서도 당시 다른 조직들과 다른 연구모델을 지향했던 ‘여성문제연구회’는 개인회원들의 연회비와 입회비를 정함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경우, 강원용이라는 개인이 가졌던 해외 네크워크를 통해 ‘독일 아카데미’와 WCC의 지원이 아카데미 조직 운동을 시작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1966년에 건립된 수유리의 아카데미 하우스와 중간집단 육성 프로젝트가 바로 이들의 지원으로 가능했던 일이라고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교양강좌와 이를 기반으로 한 여성학과의 대학원 설치 과정까지의 연구 개발비 확보에도 해외 연구기금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지적했다. 여성학연구위원회가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미국 국제개발처의 연구비와 더불어 아세아기금과 교내 연구비 수혜를 통해 진행됐다. 매학기 여성학 강좌의 개설과 여성학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성학 전문 연구소를 설립할 필요가 있었는데, 1977년에 출범한 한국여성연구소가 바로 여성학 교과과정 개발 프로젝트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또한 다양한 국제 기금의 프로젝트 지원 외에도 국제적 차원에서 이뤄진 UN의 움직임이 1970년대 여성 운동단체와 아카데미 운동, 여성연구소가 각각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한군데로 결집하는 데 또 다른 핵심적 동력이 됐다고 김 교수는 짚어냈다.

이 외에도 서은주 연세대 HK연구교수(국문학)의 「‘비판적’ 학술주체의 구성과 지식인담론의 지형」, 신주백 연세대 HK연구교수(한국현대사)의 「내재적 발전의 분화와 ‘비판적’ 한국학의 형성」 등 흥미로운 논문이 발표됐다.

 

윤상민 학술문화부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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