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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도 학자도 아닌 '뷰로데믹'의 등장
관료도 학자도 아닌 '뷰로데믹'의 등장
  • 김미경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부교수
  • 승인 2013.05.2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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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_ 법인화 이후 일본 대학의 최근 변화

 

김미경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부교수

누구든지 숨기고 싶은 일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건 딱히 자신의 결함이나 과오 때문이라기보다는 살다 보면 먼지처럼 쌓여가는 이런 저런 경험들 때문이다. 이른바 이런 저런 일들은 시쳇말로 재수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고, 확률게임, 아니면 돌이켜 생각해볼 때만 분명히 보이는 판단착오일 수도 있다.

뭔가를 숨기고 싶은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부끄럽다는 감정 또한 객관적, 법적 범주가 아닌 주관적, 문화적인 판단에서 기인할 수 있다.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수치심에 더 가까운 감정일 듯하다. 예를 들면 아무 일없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누구에게 뺨을 맞았다고 치자. 뺨을 얻어맞은 사람은 우선 당황하고 분노하다가 상황이 발생한 객관적 정황을 파악하려 할 것이다. 누구라도 ‘올드 보이’가 되는 순간이다. 부조리한 경험의 객관적 재구성은 무릎을 치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無爲로 끝날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은 가능하면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임은 분명하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똑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시작됐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연구실로 가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메일체크를 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수십 개의 메일을 읽어 내려가면서 행정실의 A씨로부터 도착해있는 메일을 발견하곤 평소처럼 학내공지사항일 것이라 짐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뜻 밖에도 “김 박사에게, 지난 금요일 밤 이후 연구소 공동 열쇠가 분실됐습니다. 수위실의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으로 퇴근한 사람이 김 박사입니다. 규칙을 깨고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당장 돌려주십시오.” 내용은 절도혐의에 문장은 명령조였다.

A씨는 몇 달 전부터 필자가 진행 중이던 독도관련 연구로 심사가 틀어져 있었다. 메일에서 지적된 내용들은 물론 사실이 아니었고 내부인 모두는 例의 그 어느 선생이 전에도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공동열쇠를 私物인양 가지고 퇴근해버렸음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A씨라고 이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을 리는 없겠지만 열쇠분실은 그가 기다려온 내 독도 연구를 향한 절호의 공격기회였다.

이 메일은 단순한 無告인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중층의 구조적 문제와 정치적 함의를 띄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국공립 대학과 정부관료 사이의 업무분담과 권력관계에서 기인한다. 173여 개에 달하는 일본 국공립 대학에는 문부성, 현청 그리고 시청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행정과 회계를 담당하는 형태로 근무를 하고 있다. 국립대학으로 파견된 중앙 공무원들은 주로 승진이 순조롭지 않아 奧地인 대학으로 온다는 인식이 있고 縣立이나 市立의 경우도 요직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시립의 경우는 시당국과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거의 없어 민선시장의 정치적 성향이나 시의회의 입김을 많이 받는다.

이런 구조로 인해 공무원들이 교원들의 연구에 개입, 간섭하는 사례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만에 하나 시 정부나 시의회로부터 책임추궁의 가능성이 있는 민감한 연구주제일 경우 파견 공무원들의 견제가 심하게 들어온다. 여기서의 완충역할은 학문의 자유를 존중하고 교원들의 연구활동을 보장해야 하는 학장이나 학과장의 몫이다. 이런 역할분담은 행정과 연구, 정치와 학문, 공무원들과 교원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하지만 수 년 전부터 도쿄대를 선두로 법인화가 시작되면서 교원의 권리는 실종되고 대학 자체가 관료 조직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少子化의 여파로 대학 등록률의 감소세가 나타나고 지난 20년간의 경제위축으로 정부의 세수가 줄어든 상태에서 재정의 40퍼센트 이상을 정부보조에 의존하는 국공립대학의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사립대의 경우 약 13퍼센트 정도의 정부보조금을 받는다). 더군다나 법인화라는 제도는 대학도 일반기업처럼 재정자립의 책임을 지고 운영해야 한다는 시장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어 작금의 제도정착단계에선 대학이 정부에게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렇게 위축된 분위기이지만 A씨의 無告는 분명 범법행위였기에 반격을 시작했다. 변호사를 찾아가 일본법률상 무고는 가볍게는 경범죄로, 무겁게는 2년까지의 징역에 처해진다는 내용을 들었다. 만약 재판까지 가게 되면 승소가 확실하다는 조언도 있었다. 평소 인권연구로 친분이 있던 법학자들로부터 일본 대학 내에 얼마나 반시대적이고, 반세계화적인 인권침해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는지를 듣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었다. 이러던 중 학장을 겸임하고 있던 연구소장에게 하나의 해결 방안으로써 A씨의 서면사과를 요구했고 그가 적절하게 대응한다면 일단 조용히 넘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난 2월의 일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현재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린 듯하다. 인사이동이 있던 올해 4월 1일, A씨는 시의 다른 소속 기관으로 전근돼 갔고 학장은 자진 사임했다. 법인화가 진행되던 임기 동안 줄곧 대학을 ‘조직’으로 교원들을 ‘사원’으로 불러가며, 교원 출근카드 등록제, 교원 명찰 달기 의무화, 하루 8시간 이상 근무 시 사전 승인제, 교원의 동선을 알리는 스크린의 설치 등으로 교원들의 아이덴티티 없애기에 앞장 선 그였는데 말이다.

정치에 민감한 한국적 맥락에 폴리페서(Polifessor)가 있다면 관료가 판을 치는 일본대학엔 뷰로데믹(Bueaudemic)이 등장했다. 관료(bureaucrat)도 아니고 학자(academic)도 아닌 그들은 누가 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乙이 되기를 자처한다. 대학 커뮤니티의 기본적 사명은 뒤로 한 체 교원을 사원으로, 학생을 소비자로, 교육을 상품으로, 연구의 가치를 산학협동상의 이익만으로 계산하는 뷰로데믹들의 인문학적 철학부재에 법인화의 미래가 어둡게만 보인다.

김미경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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