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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지치 빛에 취한 여든살 … 천연 五方色 구현 위해 뛰는 ‘만년 현역’의 열정
푸른 지치 빛에 취한 여든살 … 천연 五方色 구현 위해 뛰는 ‘만년 현역’의 열정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5.20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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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6. 전통 천연염색 - 이병찬 여사

‘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은 민화·부적, 전통상례, 국악, 무속, 탈춤, 木人,종가, 족보, 단청물감 등 전통시대에 형성된 한국 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 재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속깊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 문화의 원류를 재인식하기 위한 기획이다. 이번호는 우리의 식물을 원료로 전통천연염색의 기법을 연구해 전하고 있는 이병찬 여사에 대한 얘기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 이병찬 선생이 염색한 한지 부채 사진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염료를 사용해 종이나 천, 실 따위에 물을 들이는 것이 염색이다. 그 종류는 많고 각 나라마다 다르지만, 빛깔을 내는 재료인 염료를 자연에서 서식하는 식물로 하는 게 천연염색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염색도 식물을 원료로 하는 천연염색이다. 이런 우리 천연전통염색은 『규합총서』나 『임원경제지』 등의 옛 문헌에 염료 식물과 염색 방법이 기록돼 있지만, 실생활적인 측면에서는 그 맥이 사실상 끊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까다로운 염색법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염색의 재료가 되는 식물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식물염색은 쉽게 변색되는 단점이 있어 생활화 혹은 대중화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우리의 전통 천연식물염색은 그 빛깔과 품위에 있어 그 어느 나라 것보다 독특하고 뛰어나다. 이는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명맥이 끊어져 가는 우리의 전통염색을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 일을 업으로 삼아 하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쉽고 간단하지는 않다. 이병찬 여사(81세)는 열정과 노력으로 사재를 털어가며 인생의 중·후반을 우리의 전통염색 연구에 매진한 분이다.

80을 넘긴 나이의 선생이 30여 년 간 전통염색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빛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감각 때문이다. 그 계기는 박물관 유물에 담긴 色을 보면서 부터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우리의 옛 색상은 보는 내내 온화한 느낌을 들게 하더군요. 색감도 탁월하고요. 그 자연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끌렸지요.” 이후 우리의 빛깔을 재현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전통염색이다.

50줄에 시작한 전통 천연염색의 길
중국 천진에서 태어나 해방 후 환국한 선생의 인생은, 그 시절 사람들이 대개 그랬듯이 녹록치 않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온 부모의 가난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이어졌고, 결국 10대 후반 때부터 생활전선에 나선다. 외국회사의 타이피스트와 비서로 재직했다. 중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외국계 회사들에서 오래 재직했다는 게 역설적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의 하나가 되면서 전통염색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선생은 1978년에 일본인 지인을 통해 일본의 천연염색을 경험하면서 그 싹을 틔운다. 그가 천연염색에 홀린 계기는 쪽빛이다. 그것도 일본의 쪽빛. 그해 일본인 친구가 자랑스레 꺼내든 천연염색의 기모노에서 접한 쪽빛이다. 그 기억은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보면서 뭔가 분노가 치몄다는 것. 우리 쪽빛이 저것보다 좋을 것인데, 그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억하심정이다. “당시 우리 땅에선 식물염색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거든요.

 

▲ 15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천연염색 실’
분명 저것보다 우리 쪽빛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런데 웬걸, 억울한 질시는 각오가 됐어요. 오냐, 좋다. 내가 찾아내마. 조선 색을, 한반도의 빛을. 그 때 떠오른 게 푸르디푸른 빛이었지요.” 마침 3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퇴직을 앞둔 즈음이어서 은퇴 후 새롭게 무얼 해볼까 고민도 있었기에 별 갈등없이 전통염색을 선택했다. 그의 나이 52세되던 해였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려니까 만만치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인공염료가 범람하면서 식물염색은 전통이 끊어지다시피 했고, 있다고 해도 일본산뿐이었다. 게다가 국내엔 천연염색 전문가가 전무했다.

 

염색 공부를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일본 것’이라는 한계였다. 결국 우리 염색을 연구하기란 독학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작업의 방향을 바꾼다. 이후 10 여 년 간 오로지 실험과 실습, 그리고 옛 문헌을 뒤지고 발로 뛰는 노력 등으로 고된 작업을 계속한다. 고생스럽고 외로운 작업이었지만, 그를 아끼고 도와주며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생이 종이에 염색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82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故 최순우 선생의 권유였다. 최 관장은 그에게 조선시대 색지 두루마리를 건네주며 종이 염색을 권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 당시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있던 식물학자 故 이창복 교수도 그녀의 식물염색 인생에 빼놓을 수 없다. 이 교수는 쪽빛을 내는 국내 자생의 ‘둥근잎 쪽’을 찾아준 사람으로 1985년 6월의 일이다. 선생은 그 때를 ‘나의 염색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 라고 회상한다.

쪽 등 염료식물 찾아 전국 방방곡곡 헤매
식물염색을 하려면 우선 염료가 되는 식물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병찬은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꽃, 나무에서 채취한 염료를 모았다. 식물원을 찾아다니고 학자들을 만난다. 이창복 교수나 야생화전문가인 이 영주 선생 등을 만난 것도 이런 과정에서다. 또 옛문헌에 기록된 염료식물과 염색방법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이렇게 수집한 염료식물을 직접 기르고 재배해 전통염색 작업을 하는 틈틈이 그 과정을 기록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염색방법을 창출했다. 그의 염색 연구는 식물공부와 염색실험의 연속이었다. 인도의 인디고로 염색한 쪽빛과 비교하면서 한국의 쪽빛을 찾기 위해 직접 쪽을 재배하는 등 그의 실험은 말 그대로 정진 그 자체였다.

그가 ‘평생 은인’이라고 부르는 이창복교수의 독려에 힘입어 쪽을 기르며 우리 쪽빛을 찾기위한 노력을 기울인지 3년여. 쪽 앙금을 석회와 당구레(쪽 염색 때 젓는 나무막대)질한 뒤 가라앉혀 발효시키는 전통기법을 기어이 찾아냈다. 이런 그의 노력은 1990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음으로써 공인받게 된다. 쪽, 지치, 진달래, 상수리, 황벽 등 우리나라 천연식물에서 뽑아낸 색소로 모시 열 필과 명주 열 필에 50여 가지의 물을 들여 ‘천연염색 실’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한 작품이었다. 980여점의 응모작 가운데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 작품에 대해 “옛 문헌에 남은 전통염법을 들춰가며 공들여 되살려낸 색상들은, 한국인의 미감을 간직해온 바로 그 빛깔들”이라는 등의 찬사가 잇따랐고, 이를 계기로 그의 전통염색 연구는 본격화된다.

1990년 대통령대상 수상후 염색연구 본격화
선생은 1985년에 발견해 재배해온 ‘둥근잎 쪽’으로 쪽 앙금을 만들어 염색을 하고, 생잎으로도 염색을 하면서 한국의 쪽빛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갖는다. 이것을 1992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함으로써, 그는 국제적으로 한국의 쪽과 쪽빛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다. 쪽빛은 이렇듯 그의 전통염색 인생의 바탕이다. 이와 함께 그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이며 기본적인 색이다.

 

▲ 천연염색비단과 오방색으로 물들인 천. 합성염색과 달리 색이 탁하지 않고 선명하며 부드러운 빛이 감돈다.
그는 우리의 색을 五方正色에서 찾는다. 음양오행설에서 풀어낸 다섯 가지 순수하고 섞음이 없는 기본색인 靑, 赤, 黃, 白, 黑의 다섯 색이다. “옛 조선시대 각종 의궤에 나오는 궁중에서 썼던 그 오방색을 구현하는 것이 나의 과제입니다.” 식물을 삶아서 우려낸 물로 천을 염색하고 백반으로 염착해 말리는 것이 천연염색의 공정이다.

 

선생은 반복되는 실험의 과정에서 1984년 자신만의 ‘순수 장치’를 개발한다. 염색은 물을 매개로 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물속에 포함돼있는 각종 불순물은 정련과 표백 처리는 물론이고 염색과정에서도 영향을 준다. 이것들은 얼룩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매염제를 고착시키는 성질도 지니고 있으므로 매염을 할 때는 오히려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물의 수소이온지수(Ph)는 물속에 포함된 성분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인위적으로 PH를 조절해 염재로부터 색소를 추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만들기도 한다. 산성 조건에서는 섬유 속으로 연료가 쉽게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이 개발해낸 게 자신만의 이 ‘순수 장치’다. 선생의 전통염색연구가로의 인생은 구분이 있다.

1990년까지의 연구가 식물염색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선생을 더욱 식물염색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면, 2000년부터는 그간 계속해 온 실험의 결과물을 정리하고 학계에 발표해 인정받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감물 염색에 대한 논문을 <미술사 논총>에 실었고 대중 강연도 하는 등 우리 천연염색의 국내외 확산에 주력한다. 우리나라 승복의 회색에 대해 스위스 국제학회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오방색’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2006년 『난사 석주선 관장 10주기 추모집』에 싣기도 했다. 이와 함께 유물의 복원작업에도도 참여했는데, 이는 한국 고대유물의 섬유와 색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는 계기가 된다.

지치지 않는 우리 색 찾기와 평생 과제
선생은 獨身이다. 뭔가 연유가 있을 법한데, 그냥 “친구도 많고 주위에 좋은 분이 넘쳐 낙낙하게 보냈다”는 말로 대신해 버린다. 그는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게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라고 강조한다. 그에 대한 답례는 자신이 가진 전통염색에 대한 관념과 기술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이의 일환으로 선생은 전통염색의 계승발전을 위한 제자들의 양성과 대중화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1995년부터 8년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염색교실을 열어 식물염색의 생활화에 힘썼다.

 

▲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시연 중인 이병찬 선생.

 

 

이는 후에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어져 계속 염색교실을 담당하다 2010년 제자로 하여금 계속토록 하고 있다. 또 단국대 등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선생의 이런 천연염색 분야에 대한 노력과 공로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그의 염색인생과 작품 등을 담은 『염색연구가 이병찬의 염색인생 30년』을 2012년 출간했다. 이에 선생은 대통령대상 수상작품인 ‘천연염색 실’을 포함한 자신의 염색작품 221점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와 함께 1980년대 선생이 식물염색을 시작할 당시부터의 연구와 실험, 그리고 식물재배 등을 꼼꼼히 기록한 많은 분량의 ‘연구노트’도 함께 기증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선생의 전통염색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기리고자 기증받은 작품들과 ‘연구노트’를 전시하는 「이병찬 기증 특별전, 자연을 물들이다」展을 지난달 10일부터 이달 20일까지 마련했다.

칠보 노리개와 능화문 서첩, 한지 부채와 두루주머니 등의 염색작품이 선보였다. 단아하면서도 화사하고, 영롱하되 넘치지 않는 작품들이다. 전시회 기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선생이 일주일에 두 번 직접 전시장에 나와 보여주는 천연염색 시연이다. 기자가 찾은 지난 5월 9일 오후에도 선생은 시연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염색인생에 아쉬움은 없을까 싶어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없을까. 그랬더니 한마디 덧붙인다. “지치 색이 마음에 걸려요. 좀 많이 공급하고 싶은데 그 게 안 돼요. 보라색과는 또 다른, 그 짙은 푸른빛은 지치 뿌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데 너무 희귀하고 비싸요.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꼭 많이 찾아내야 하는데…”팔십 나이를 넘긴 노 연구가는 아직도 푸른 지치 빛에 마음을 걸고 있는 현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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