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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 실증주의 언어학의 또 다른 변주
경성제대 실증주의 언어학의 또 다른 변주
  • 교수신문
  • 승인 2013.05.1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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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한글 민주주의』 최경봉 지음|책과함께|2012 |280쪽

 
민주주의가 민족주의와 서로 어긋나는 곳도 있겠지만 말글 민족주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조선어학회의 ‘민족적’ 언어학에 ‘과학적’ 언어학을 내세우며 맞섰던 경성제대의 유산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변주되고 있다.

『한글 민주주의』(최경봉 지음, 책과 함께 刊)는 말글에서 민주주의를 내세워 한글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대립적 이분법으로 나누고 한글 민족주의가 지나치다고 보고 말글살이에서 대중의 선택권(13쪽)과 관습의 힘을 강조하는 한글 민주주의를 주장(16쪽)하고 있다. 이런 민주주의는 한글로만 쓰기, 맞춤법 및 표준말 규정, 말 다듬기, 이른바 ‘한자문화권’의 제이름씨(고유명사) 적기 따위의 문제에서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민족주의 전통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먼저 주시경과 한글로만 쓰기 문제를 따져 보자. 최경봉은 대한 제국 시기에 주시경이 국한 혼용과 한글 전용의 글쓰기를 독자에 따라 ‘유연하게’ 선택했으나 1910년 이후에 한글로만 쓰기를 넘어 고유어를 찾아서 혹은 만드는 ‘강한 집착’을 보였다(128쪽)고 여긴다.

‘한글전용’은 유연한 선택 문제일까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주시경은 ‘국문으로만 신문을 내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함께 보게 함이라’고 말로 봉건적 신분 차별에 반대함을 분명히 했다. 유학적 교양을 지난 지배층은 굳이 글쓰기에서 평민이나 여성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고 수신문(<황성신문>)과 암신문(<제국신문>)처럼 구별을 원했다. 한글만 쓰기는 민족주의면서 민주주의적이다. 쉽고도 대중적인 한글은 지배 계급의 정보 독점을 깨뜨리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한글 민주주의』가 말하는 ‘유연한’ 선택은 실질적으로 말글에서도 차별을 이어가자는 주장일 뿐이다. 1910년 이후 주시경은 한글로만 써야 하나 될 수 있다는 처음의 깨달음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한자 폐지와 국어 정화 운동이 ‘독단적으로 진행’된다는 비판(108쪽)은 한자 섞어 쓰기가 실천적 오류임이 분명해지진 지금, 인습과 낡은 말글 의식을 지켜 계급적 특권과 독점을 그대로 지키려는 수구파의 반동에 지나지 않았다. “법률문과 행정 공문의 비민주적 표현 방식이 일본식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를 바로잡는 정책적 접근은 외래 요소를 정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의사소통을 민주화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116쪽)이란 표현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허구적 이분법은 되풀이 됐다.

일본식 한자어나 표현을 바로잡으려는 까닭이 바로 의사소통의 민주화가 아닌가. 오랜 한문 숭상의 폐해를 극복하려면 지나치게 많은 한자 어휘의 제한이 필수적이었는데 지배층 중심의 말글 의식이 이어져 새말을 만들지 못하고 미국식 영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말 다듬기가 오히려 ‘서구식 외래어를 확산’(111쪽)시킨 게 아니다. 한문 숭상이 영어 숭배로 이어진 것이다. 사실은 우리말과 글을 존중하는 전통이 약한 우리지성사에 원인이 있다. 『한글 민주주의』는 어려운 형태주의 맞춤법이 뿌리내린 까닭도 일제 시절에 조선어 학회의 ‘헌신적인 민족주의’적 활동의 ‘역사적 정당성’(80쪽)에서 찾았다. 형태주의 맞춤법을 감정에 치우친 것으로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대중의 선택과 어긋난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되지 못한 다양한 적기를 하나로 통일하려면 이념적인 표준형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 관습을 존중하거나 경험적 다양성을 따라가면 무질서하게 돼 더 어렵게 된다. 경성제대의 과학적 조선어학을 내세운 이희승마저도 이 점에서는 조선어학회와 일치했다. 형태주의 맞춤법은 대중의 선택권이 전문가의 권위와 어긋나지 않고 조화를 이룬 경우다.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 민주주의를 내세울 것은 없어 보인다. 이희승의 ‘과학적’ 조선어학이 조선어학회와 가졌던 단 하나의 연결 고리인 형태주의 맞춤법마저도 『한글 민주주의』는 부정하고 있다. 이른바 ‘한자 문화권’의 제이름씨(고유명사) 적기에 “문화적 공통성과 외국어 고유명이라는 특성을 보두 수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169쪽)라고 하고 한국 한자음으로 적기도 허용하고 한자 병기도 허용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이란 개념은 『한글민주주의』가 내세우는 민주주의와 어긋난다. 한자 문화권이란 지배층 중심의 관념이다. 제이름씨는 서술적 속성(기의) 없이 있을 수 있는 기호로서 말광(사전)에서 빼고 뒤칠 때에도 소리를 그대로 옮기는 만큼 현지 소리대로 적기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 박정희가 쓴 한글 광화문 현판을 갈음한 한자 현판에 대해 ‘한글 민족주의의 과잉을 절제’한 것으로 ‘21세기의 선택은 전통과 민주주의’라고 본다(178쪽). 한자 현판은 글자를 독점해 온 계급의 특권을 과시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것은 모화와 봉건 인습을 상징한다. 또 “한글처럼 정교한 체계를 가진 문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221쪽)라면 “한글이 가장 우수한 문자”라는 주장에 “불편”(221쪽)해 할 것도 아니다. 국어학자들도 한글이 가장 우수한 글자임을 마음껏 자랑해도 좋다.

“주시경과 조선어학회 전통 죄다 비판”
『한글민주주의』는 또한 한글은 우리 문자이면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한글의 주인이 될 수 있듯이, 한자는 수천 년 동안 “우리의 문자였고 지금도 그렇다”(257쪽)라고 했다. 기호로서 한글은 의미가 빠진 형식적 기호로서 쉽게 국경을 넘어 쓰일 수 있다. 그러나 한자는 표의 문자로서 상형의 성격이 끝내 가시지 않아 의미를 떠나지 않는다. 뿌리를 캐어 보면 차이나(중국) 고대 역사의 보물 창고가 나온다. 그렇더라도 이것을 소리와 무관하게 우리말 어순에 따라 뜻 중심으로 읽는다면, 국경을 넘어 통용되는 문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한문을 읽는 방식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식의 한자 한문 읽기는 우리를 중화사상의 늪으로 빠뜨릴 것이다.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라는 관점에서 『한글 민주주의』는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을 죄다 비판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민족주의와 서로 어긋나는 곳도 있겠지만 말글 민족주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나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소박하게 이해한 탓이 아닌가 한다. 조선어학회의 ‘민족적’ 언어학에 ‘과학적’ 언어학을 내세우며 맞섰던 경성제대의 유산이 이제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변주되고 있는 셈이다.

 


김영환 부경대·신문방송학과
서울대에서 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저서로 『한글철학』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한글의 기원 및 창제 원리로서의 ‘상형’과 고전모방의 재검토」 등이 있다. 현재 한글철학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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