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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알았던 수학자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알았던 수학자
  • 양재현 인하대·수학통계학부
  • 승인 2013.05.13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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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야기 16. 프리드리히 히르체부르흐의 명복을 빌며

독일 본에 있는 막스-플랑크 수학연구소의 초대소장이었던 히르체부르흐 교수(Friedrich Hirzebruch, 1927~2012)가 지난해 5월 27일에 별세했다. 나는 그를 1982년 버클리에서 처음 봤다. 당시 미국 버클리 수리해석연구소(MSRI) 초대 소장이었던 천(陳겛身, 1911~2004) 교수의 초청으로 그는 힐베르트 모둘러 곡면에 관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을 들었던 것이다. 그와 동갑이라는 이치로 사타케 캘리포니아대(버클리) 교수가 질문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젊은 수학자 격려하며 공동연구 권장해

나는 1994년 1월~2월 동안 막스-플랑크 수학연구소에 초청돼 즐겁게 연구하는 가운데 그를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고 그는 친절했다.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열리는 정수론 세미나 전인 12시 30분경에 초청연사와 참석자들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하는데 이 점심식사에 그는 거의 참석했다. 그는 젊은 수학자들을 격려하며 공동연구를 하도록 권장했다. 귀국 며칠 전에 그의 연구실에 가서 그에게 최종보고서를 건네며 감사의 뜻을 전했더니, 그는 나에게 점심을 한 턱 내겠다며 함께 점심을 하고 싶은 사람을 추천해 달랬다. 그래서 막심 콘체비치(Maxim Kontsevich, 1964~ : 1998년에 필즈상, 2012년에 쇼상을 수상한 러시아 수학자. 1999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음, 현재 IHES 교수이고 마이애미대 석좌교수)를 추천했다. 귀국 이틀 전에 그가 데리고 온 두 명의 수학자들과 함께 다섯 사람들이 점심을 하며, 이런 저런 이런 흥미로운 대화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화중에 나는“한글이 지구상의 모든 언어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라고 말했더니, 그와 그가 데리고 온 수학자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믿기지않는 듯이 어리둥절했다. 실은 그들은 한글이 어떤 언어인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나의 이 말을 콘체비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부친이 한국어학을 연구하는데 종종 그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말해 줬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의 부친이 진주에 있는 경상대에 3년간 초빙돼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고 하며, 나에게 틈이 나면 아버지를 만나보기를 권했다. 귀국 후에 틈을 내어 손진우 경남대 교수와 함께 그의 부친을 경남대 교수아파트에서 만났다. 그의 모친이 요리해 준 음식을 먹으며 그의 부친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의 부친은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며 콘체비치와 그의 형에 대해 자세히 말해줬다.

내 기억에 의하면 형은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콘체비치가 어려서부터 수학에 흥미를 가지며 수학재능을 발휘했으며 물리학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말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불행히도 그의 모친은 전혀 우리말을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대충 눈치 채며 즐거워했다. 기억에 의하면 우리 세 사람이 술도 마셨던 것 같다, 무슨 술을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맥주이리라.

위상수학, 복소대수기하학의 대가

히르체부르허는 1927년 10월 17일 독일 베스트팔리아주 함시에서 태어나 1945~1950년 기간 뮌스터대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2~1954년 동안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초청돼 연구했으며, 1955~1956년 동안은 프린스턴대의 조교수로 임용됐다. 1956년에는 독일로 돌아와 본대 교수가 됐다. 그는 위상수학, 복소대수기하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마이클 아티야(Michael Atiyah, 1929~ : 1966년에 필즈상, 1988년에 코프리 메달, 2004년에 아벨상을 수상한 영국 기하학자)와 함께 위상K이론을 창시했다. 특히 복소다양체의 히르체부르흐-리만-로흐 정리는 그의 유명한 업적 중의 하나이다. 1981년에는 막스-플랑크 수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됐으며 1996년에 은퇴했다. 1992년에는 유럽수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1988년에 울프상, 1989년에 로바체프스키 메달, 1999년에 아인슈타인 메달, 2004년에는 칸토어 메달을 받았다. 1987년 회갑 때는 그의 논문집이 스프링거 출판사를 통해 출판됐고, 2007년에 그의 80세 생신 때는 세계 각지에서 온 300여 명이 본에 와서 그의 80회 생일을 축하해 줬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20세기 후반에 1930년대에 나치 정권에 의해 붕괴됐던 독일 수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힘썼던 행정력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뛰어난 수학자이다.

1997년 1월~4월 동안 이 연구소에 다시 초청됐을 때는 거의 매일 그를 만났다. 이 당시에 필자는 1월에 틈을 내어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로마, 베니스, 밀라노, 모나코, 니스, 파리, 하이델베르크 등지를 여행했다. 2002년 1월에 독일의 함부르크대와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초청강연을 하고 하이델베르크대와 막스-플랑크 연구소를 방문해 여러 친지들을 만났다.

본에서 히르체부르흐를 수요일 정수론 점심회동에서 만났다. 그 당시 그는 이미 은퇴했지만 건강해 보였다. 2011년 4월과 5월에 약 한 달 반 동안 다시 막스-플랑크 연구소에 초청됐는데, 약 9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그를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 이유는 그는 등이 심하게 굽어져 있어 마치 곱사등이 노인 같았다. 연구소의 직원의 말에 의하면 약 1년 전에 넘어져 심하게 다치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일주일 한두 번 정도 연구소에 나오는데 대개 오후 3~4시 사이에 방문수학자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도 몇 차례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말하고 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후 1년이 경과된 지난해 5월 27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 늦어나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양재현 인하대·수학통계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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