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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 서양의학·의료 수용 ‘준비’ 있었다
19세기 조선, 서양의학·의료 수용 ‘준비’ 있었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5.13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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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책_『 근대의료의풍경』황상익지음|푸른역사|888쪽|49,000원

최근 폐업까지 논할 정도로 이슈가 됐던 진주의료원의 역사는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료원의 전신인 자혜원은 1909년 순종의 칙령으로 1910년 함흥, 진주, 청주에 시범적으로 세워진 서양식 병원이었다. 진주자혜원은 1925년 경상남도립진주병원으로 개명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진주의료원 문제는 존폐 여부를 떠나 한국 보건의료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저자는 187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 의학과 의료 도입 및 수용을 조선사회가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사진은 '제중원'으로 바뀐 '광혜원' 모습  (사진출처 : 연세대학교 홈페이지)
지난달 26일 발간된『근대 의료의 풍경』(황상익 지음, 푸른역사 刊)은 187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 의학과 의료의 도입과 수용을 조선 사회가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기술됐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 공통적으로 증가한 농업생산력처럼, 조선에서도 이미 인구 성장, 도시화, 신분제의 이완 등 근대적 특성이 싹트고 있었다는 점, 성리학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전통 유학의 변모를 꾀하며 외래 종교와 사상에 대한 관심과 수용이 급증했던 ‘개국’이전의 조선 사회의 실상 등을 근거로 저자인 황상익 서울대 교수(의학사)는 20세기 후반기의 민간·군부 독재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민주화 산업화 세계화의 기반을 닦은 것과 비슷한 모습을 19세기 조선에서 ‘의료’라는 프리즘으로 세밀히 들여다보고 있다.

113명 국비유학생의 기구한 운명

이책은모두4부로구성돼있다.‘ 1부 개국과 보건의료환경의 변화’에서는 최초의 우두의사 지석영을 필두로 두창 퇴치의 숨은 공로자 김인제, 한국계 미국인 의사 필입 졔손 서재필, 최초의 개업의 박일근과 염진호 등을 다룬다. 황 교수는 국가가 아직 우두 사업을 계획하기 전에, 이미 지석영을 비롯한 여러 민간인들이 외래 문물이라 금기시했던 우두 접종을 시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근대’가 위에서 주어지기 전에 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유학열풍 속에서 일본으로 떠난 113명의 관비유학생들이 역사의 흐름에 朝變夕改하는 그들의 기구한 운명도 1부에 기록돼 있다. 그들의 가장 든든한 박영효 내무대신의 실각, 국모를 살해한 을미사변, 경복궁에 유폐된 국왕을 빼돌리기 위한 친미-친러파의 춘생문 사건 등이 유학생들의 입지를 점차 좁혀갔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학부 전체예산 12만원 중 4만원이 계속해서 유학생비로 지급됐었지만,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며 유학생의 절반이 게이오 의숙을 졸업하지 못한 채 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아픈 역사도 이 책은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2부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 제중원’에서는 제중원의 설립부터 세브란스 병원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당시의 신문자료를 별첨해 추적한다. 두창 치료를 위해 굿을 벌이던 민간 처방과『동의보감』으로 대별되는 전통의학이 서양 근대의학의 도입으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정부의 근대의학 도입 시도는 광혜원 설립으로 1차 결실을 맺는다. 갑신정변 주모자로 처형당한 홍영식의 저택이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 건물로 내정돼 1885년 4월 10일에 개원했다. 그러자 고종은 4월 12일에 廣惠院이라는 공식 명칭을 하사했다.

한국 근대사의 일면을 장식하는 광혜원의 개원은 의학사, 교회사, 근대 교육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다. 황 교수에 따르면‘광혜원’이란 이름은 4월 14일부터 26일까지 약 2주 동안 사용됐고, 이후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바뀌게 된 사연이다. 황 교수는 제중원이 설립된 1885년 무렵에는 외교·통상뿐만 아니라 새로운 근대 문물을 도입, 시행하는 업무를 대체로 외아문이 관장했기에 제중원은 외아문 소속기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日겛걧』, 『 고종실록』, 『 備邊司謄걧』같은 조선 정부 기록물을 인용하며, “제중원으로 이름을 고친 것은 단순한 개칭이 아니라 소급 개칭한 것이며 ‘改付標’가 그것을 보여준다”라고 주장한다. 『고종실록』4월 26일자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라는 기록이 황 교수가 인용한 근거다.

대한의원 최고 수혜자는 이완용

‘3부 자주적 의료 근대화를 향하여-의학교와 광제원’에서는 당시 조선인과 재한 일본인의 건강, 질병 상태를 비롯해 대한제국 정부의 전염병 대책을 다뤘다. 최초의 의학교 교수였던 김익남을 비롯해, 전통과 근대가 절충된 새로운 형태의 국립병원인 광제원의 탄생부터 일제의 광제원 장악의 역사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을사오적의 대표격인 이완용 피습 사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4부 식민지 의료기관 대한의원’를 읽다보면, 이 책이 역사서인지 의학서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지만, 저자는 이완용이 대한의원의 최고 수혜자라는 점을 연결고리로 제시함으로써 노련함을 보여준다.

의학사를 전공한 황상익 교수는 한국과학사학회장, 한국생명윤리학회장, 대한의사학회장 등을 역임했고, 「제중원의 신화와역사1, 2」,「 식민시대지식인, 유상규의삶의궤적」등 170여편의논문과,『 인간은 유전자로 결정되는가?』(명경刊, 1995),『 역사 속의 의인들』(서울대학교출판부 刊다, 2004) 등 30권이 넘는 저·역서를 내며 왕성한 글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근대 의료의 풍경』은 <프레시안>에 2010년부터 101회 걸쳐 연재한 글에 풍부한 사료를 덧붙여 발간한 책이다.

황 교수는‘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내세우며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SBS 드라마「제중원」을 보고 너무나도 왜곡된 제중원의 모습과 한국 근대 의학의 역사에 당혹스러웠다고 말하며, 이 책을 집필하는 내내 철저한 사료 비판과 충실한 근거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고 얘기했다. 또한‘주문 맞춤형 연구’를 강요받지 않기 위해 소속과 출신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역사가 선전의 도구가 아닌 학문이 되기 위해서, 박사를 마치고 30년을 재직한 서울대 의대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를 내린 그의 이번 책이 한국 근대의학의 역사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신호탄이 될지 궁금하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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