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1 00:15 (일)
괴테의 詩心, 세계와 영혼이 ‘하나’되는 곳에 물집 잡히다
괴테의 詩心, 세계와 영혼이 ‘하나’되는 곳에 물집 잡히다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5.13 1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 37 프랑크프루트 암 마인의 ‘괴테 하우스’에서

 

괴테 하우스의 모습. 사진=최재목

마인 강가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와서, 프랑스 작곡가 토마가 곡을 붙인 오페라 「미뇽」에 나오는 아리아를 회상한다. ‘그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를? 짙은 잎새 속에서 황금빛 오렌지가 이글거리고 푸른 하늘에선 한 가닥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빌헬름 마이스터』3장에 수록된, 고아 소녀 ‘미뇽’이 부르는 노래다.

카이저 거리를 따라 걸을 때, 눈에 드는 유럽에서 가장 높다는 258.7m의 신 코메르츠 방크 건물. 하늘로 치솟은 여러 건물들. 그 가운데서 내 눈길은 ‘유로중앙은행’에 멎는다. 별이 몇 개 붙은 유로화 심벌 간판을 쳐다보고, 주머니에 든 유로화를 스윽 꺼내든다. 이 돈이 돌고 도는 유로존을 생각해본다.

프랑크푸르트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라인 강 지류인 마인 강으로 간다. 가슴을 쫙 편 물길. 어디든 강은 큰 위안이다. 한스 토마(1839~1924)가 그린「마인 강 풍경」속의 풀들, 꽃들은 없어도, 물결은 예전 그대로리라. 괴테는 短詩「일름강」에서 노래한다 : ‘나의 강둑은 빈약하다, 그러나 나직한 물결소리 들으라./강물이 이 둑을 지나 흘러간다. 많은 불멸의 노래가’(전영애 옮김, 『괴테시전집』, 376쪽). 물결에서 불멸의 노래를 본다. 인간의 영혼처럼, 영원히 순환하는 물처럼. ‘인간의 영혼은. 물과도 같아라/하늘로부터 와서/하늘로 올라가고/다시 내려와/흙이 되어야 하는구나/영원히 순환하며’(「물 위 정령의 노래」, 258쪽). 괴테는, ‘생각하면, 나는 존재한다고. 좋다! 하지만 누가 늘 생각만 하겠는가? 나만 해도 종종 정말로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존재했는데’(「나」, 389쪽)처럼, 경험과 이성을 존중한다. 취리히의 페스탈로치가 보여주는 신중심의 헤브라이즘적 경향을 벗어나 헬레니즘적 사유가 깊숙이 자리한다. 

괴테 하우스의 외부 모습. 사진=최재목

괴테의 생가, 고딕양식의 우아한 적갈색 5층 저택으로 발길을 옮긴다. ‘적갈색’이라!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 했던 괴테는『색채론』에서 말한다 : ‘활기에 넘치는 민족 예컨대 프랑스 인들은 능동의 영역에서 상승된 색을 좋아하고, 차분한 민족성을 가진 영국인과 독일인들은 짚색이나 가죽색 또한 짙은 청색을 선호한다. 위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이탈리아인, 스페인 사람들은 수동의 영역으로 기우는 붉은색 외투를 즐겨 입는다.’(장희창 옮김,『색채론』, 266쪽)고.

요까지는 좋았는데,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흑인의 용모’에서처럼 ‘특정한 색이 특정한 용모와 일치한다’고 하고 ‘우리는 흰색의 인간…그 어떤 특수한 색으로도 거의 기울지 않은 인간이 가장 아름답다.’(219~220쪽)고 주장한다. 색과 인종을 연결시키고, ‘흰색’을 기준으로 하고 그것을 가장 아름답다고까지 하니, 좀 씁쓸하다. 어쩌겠나, 유럽인의 눈에 유럽인종색이 보인다면. 생가의 계단을 오르며 차례로 관람하는데, 특히 4층 ‘시인의 방’에 관심이 쏠린다. 이곳이『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파우스트』의 초고를 집필한 곳이란다.

오래전, 어느 겨울, 나는 에리히 프롬의『소유냐 존재냐』를 읽고서 괴테를 다시 이해하게 됐다. 그 책에 인용된 시「재산」에서 내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노라, 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다만 내 영혼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사상만이 있음을./그리고 사랑에 가득 찬 운명이/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기쁘게 하는/모든 행복한 순간만이 있음을.」생명을 사랑했고, ‘소유’에 대립해 ‘존재’를 지향했던 괴테. ‘소유’는 파우스트의 몸과 영혼을 탐했던, ‘사랑해서는 안 될 빛’(메피스토펠레스)이었다.  

괴테 하우스. 사진=최재목

나는 주머니 속의 유로화를 한 번 더 만지작거린다. 요게 바로 메피스토펠레스인가. 인간과 자연과 세계의 생명과 영혼을 끊임없이 탐하는 자본, 그리고 욕망. 그것은 우리에게 감미롭게 다가와 은밀한 계약을 강요한다. 그 악마의 간계에 속아 우리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기고 만다. 꽃은 꺾고 싶어지는 법. 그러니, 꽃이 ‘눈에 띄었을=발견되었을’(Gefunden) 때는 이런 거부의 목소리를 읽어내야 함을, 괴테는 알았다 : ‘내가 꺾으려 하자/꽃이 가냘프게 말했네. 절 시들도록 굳이/꺾어야 겠어요?’(「발견」, 448쪽)

괴테는 직관된, 있는 그대로의 자연현상을 그는 존중하고자 한다. 그는『색체론』에서 빛의 ‘근본현상=原現像’을 말한다. 파헤치려 하지마라! 인간에게 직관된 영역(=자연)을 넘어설 때 ‘추상적 인식’(=추상화)이 시작되나 거기부터는 ‘월권’이다. ‘도대체 진리가 벗겨도 벗겨도 껍질뿐인 양파란 말인가?/그대들이 그 안에다 넣어두지 않은 것. 그것 꺼낼 수야 없지.’(「분석가」, 374쪽). ‘언어를 해부하겠다는 거지. 하지만 언어의 사체뿐이로구나./정신과 생명은 사나운 해부도에 곧바로 미끄러져 나가버렸구나.’(「언어연구가」, 379쪽)처럼, 더 이상을 알고자 자연의 몸을 발가벗기고, 현재 보이는 것 그 뒤편에 손을 집어넣을 때, 자연의 ‘너머-근저’(=所以然之故)로 들어서는 순간, ‘정신과 생명’은 ‘사체’로 변하고 외경과 신성은 사라진다.

우리는 ‘자연과 만나면서’ 자연을 위한 기관으로 ‘형성되고’ 이로 해서 ‘나 속의 자연’과 ‘바깥의 자연’은 조응한다(「색채론 개요」참조). 자연은 결국 알 수 없는 것. 그대로 두고 바라만 봐야할 뿐. ‘자연은 씨도 껍질도 갖고 있지 않네./자연은 그 모든 것과 하나인 것이네./네가 씨인가, 껍질인가?/네 자신을 시험해보라.’(「내키지 않는 외침」,『색체론』, 347쪽) 맞다. 세계와 영혼이 ‘하나’되는 곳에 괴테의 시심이 물집 잡혀 있었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