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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불러 스타가 된 열여섯 소녀 … 한국적 서정주의를 세계에 떨친 樹話
「목포의 눈물」 불러 스타가 된 열여섯 소녀 … 한국적 서정주의를 세계에 떨친 樹話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5.08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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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가 키운 문화예술


‘목포항’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방식은 여럿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자는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단연 이난영의 「木浦의 눈물」이고, 둘째는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며, 셋째는 문순태의 『타오르는 江』이다. 목포항이란 이 특수한 공간은 인접해 있는 목포 바다와 영산강을 따라 남도의 특유한 문화예술적 상상력을 키워냈다. 이난영, 김환기, 문순태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한국 가요사를 훑어보면 16세 소녀 이난영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목포의 눈물」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으로 시작하는 「목포의 눈물」은 가사를 상금 걸고 공개모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난영을 얻은 OK 레코드사는 1933년 社勢를 과시할 겸 유행가 가사모집 광고를 냈다. 약 3천 통의 응모 작품이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서 뽑힌 게 바로 「목포의 눈물」이었다. 작사자는 목포 출신 文一石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이 가사 하나로 가요사적 인물이 됐지만, 작사 활동은 이 한 편으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OK레코드사는 가사에서 재미를 봤던지 곡까지 현상 모집했으나 마땅한 작품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회사의 전속 작곡가인 孫牧人에게 곡을 맡겼다.

손목인은 그때 「갈매기 항구」란 곡을 만들어 고복수에게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 가사를 받고 보니 내용이 비슷했던지 「갈매기 항구」의 멜로디를 그냥 「목포의 눈물」에 붙여 버렸다. 이난영은 이 노래로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당대의 ‘스타’가 됐고, 당시 돈으로 5백원 정도(당시 일류 샐러리맨의 1년치 봉급 수준)의 월급을 꼬박꼬박 받게 됐다. 「목포의 눈물」이 히트를 치자 이난영의 오빠 이봉용은 목포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노래 「목포는 항구다」를 만들어 동생이 부르게 했다. 朴南甫 작사의 가사로 곡을 붙인 이 노래 역시 크게 히트했다.

두 곡은 아직도 애창되고 있는 노래다. 그러나 이들 노래 때문에 ‘개항장’이기는 했으나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한산하고 쓸쓸한 항구가 낭만 깃든 명승지로 ‘환골탈태’한 것만은 분명하다. 또 하나 목포항과 관련한 상상력의 젖줄로 목포앞 ‘시아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목포의 문인들은 이 시아바다를 淸湖라고 부르고 있다.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호수’에 비유한 셈이다. 이 시아바다에 있는 안좌도가 바로 화가 김환기의 고향이다. 1970년대의 김환기(1913~1974)는 여기서 ‘가능성의 바다’를 화폭에 그려냈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 하나에는 화폭 뒤편에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가 적혀 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을 밝음 속에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가수 유심초가 불러서 유명해진 노래지만, 사실은 당대의 일급 화가와 시인의 만남이 먼저 있었다. 김환기는 화가가 되고 말았지만, 그는 언제나 시인을 꿈꾸던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들이 열리고 있던가. ‘환기미술관’의 전시는 이름 그 자체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다.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인 김환기.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독창적 예술 세계를 정립한 그는 한국은 물론 일본, 파리, 뉴욕에까지 그 이름을 알린 인물. 그런 그의 내면에는 안좌도에 늘 마주보던 목포 앞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으니, 그것이 상상력의 원질이었다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목포항은 영산강과 이어져 있다.

사연 많은 영산강 물줄기가 목포항에 이르러, 마침내 大海로 흘러들게 된다. 문순태의 대하소설 『타오르는 江』은 지난해 9권(소명출판)으로 발간된 바 있다. 작가가 이 소설 집필에 나선 게 1975년이었으니, 꼬박 37년이 걸린 셈이다. 벌교에서 시작된 『태백산맥』과 거대한 양대산맥을 이룰 이 소설은 영산강을 무대로 살아가는 100년 전 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다. 1886년 노비세습제 폐지에서 시작해, 동학 농민전쟁, 개항과 부두노동자의 쟁의, 1920년대 나주 宮三面 소작쟁의 사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까지 반세기에 이르는 웅장한 구도를 갖춘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파업을 주도했다가 나무꾼으로 살아가는 ‘웅보’다. 목포 남항에는 鹽業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예부터 많았다. 문순태의 이 대하소설에 등장하는 웅보도 그런 소금점(염업)을 낼까 고민하는 바닥 민초의 한 사람이다.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나도 웅보한테 그랬지요. 우리 두 사람이 소금점을 내게 되면, 덕칠이나 판쇠 그리고 다른 사람꺼정도 밥줄을 맹글아줄 수가 있다고 말이요. 염한이 노릇이 나무장수보다 몇곱이나 낫것지요. 우리가 새끼내에 처음 터를 잡고 땅을 두레일로 일굴 때도 염한이 노릇해서 연명을 해구만이라우.」 염주근은 어떻하든 웅보를 설득하겠으니 소금점을 낼 수 있는 점포하나를 물색해두라고 말했다.” 염주근과 웅보는 선창에서 부두노동자로 생계를 연명하다 파업주동자가 돼 나무꾼이 됐다. 그들은 소금점을 내는 게 그깟 나무꾼보다 낫다는 것을 환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시 민초들의 생활과 풍속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뛰어난 대하소설이 영산강-목포항을 주무대로 탄생했다.

작가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사장 돼버린 전라도 토박이말을 최대한 되살렸다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채굴자라는 사명감으로 이 소설을 쓰면서 녹음기를 들고 시골장과 산골마을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결과 독자들로부터 전라도 토박이말을 가장 폭넓고 실감나게 구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역시 남도의 상상력이 키워낸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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