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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家는 선비문화 실천하는 道場 … 최첨단 산업체 CEO직 내던진 어떤 숙명
宗家는 선비문화 실천하는 道場 … 최첨단 산업체 CEO직 내던진 어떤 숙명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5.06 17: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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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 5. 宗家와 宗孫 - 義城 김씨 鶴峰 종택과 金鍾吉 종손

 

▲ 임진왜란 시기인 宣祖 25年(1592) 6월 1일, 경상좌도관찰사 鶴峰에게 선조가 내린 訓諭敎書(88×135cm).

‘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은 민화·부적, 전통상례, 국악, 무속, 탈춤, 木人, 족보, 단청물감, 장례, 염색 등 전통시대에 형성된 한국 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 재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속깊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 문화의 원류를 재인식하기 위한 기획이다. 이번호에서는 宗家와 그곳을 지키는 宗孫을 만나봤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반듯하고 훌륭한 조상을 가진 집안의 후손은 대개 그 조상을 닮는다. ‘집안 내력’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런 후손은 당연히 조상이 자랑스럽다. 해서 그 정신과 정신이 깃든 가풍을 지키고 계승하려 한다. 가문이라는 공동체를 빛내고 세상의 본보기가 된 조상의 맏아들로 이어 온 집이 宗家이고, 종가를 대표하면서 다스리고 살피는 사람이 宗孫이다. 조상의 정신 계승과 가풍 유지의 중심에 바로 종가가 있고 종손이 있는 것이다. 종가는 조선시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족공동체의 형성배경과, 이것이 사회와 국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아이콘이다.

이런 관점에서 종가는 그 자체로서 높은 문화를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 종가문화의 핵심은 학문과 덕행을 바탕으로 한 선비정신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한 예의와 범절을 숭상하는 것만이 선비정신이 아니다. 사회적 소임과 국가적 책무를 다하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구현도 선비정신을 계승한 종가문화의 한 근간이다. 학문과 덕행의 실천적 방향의 연장선이 바로 그것이다. 집안 고유의 전통과 함께 이런 정신이 계승돼 오는 가문을 명문가라 할 수 있고, 사적이나 공적으로 이런 책무를 다하고 있는 그 가문의 종가와 종손은 그런 차원에서 존중의 대상이 된다.

400년 ‘충절과 의기’의 金誠一 가문
경북 안동의 400여 년을 이어 온 義城 김씨 鶴峰종택도 그런 가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 중의 하나다. 학봉종택은 조선중기 문신 학봉 金誠一(1538~1593), 그러니까 文忠公을 입향조로 한 종가다. 학봉 김성일에 관해서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西厓 유성룡과 함께 조선을 빛낸 문신이자 대학자다. 학봉의 학문과 덕행은 나라가 왜군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현장에서 충절의 의기로 삶을 마감한데서 그 빛이 난다. 그것은 또한 의리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높은 학문과 수양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정신으로 나타난다. 임진왜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어떠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소임을 끝까지 다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학봉의 이런 ‘충절과 의리’의 정신은 자손들에게 이어져 학봉종택을 드리우고 있다. 학봉의 직계후손들 중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항일 독립운동가만 11명이다. 그리고 11대 종손으로 안동지역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한 金興洛의 문하에는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에 이른다.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현재 15대로 이어지고 있다.

전 종손 故 金時寅의 장남인 金鍾吉 씨(72)가 15대 종손이다. 김시인-김종길로 이어지는 이 부자의 종손 계승은 우여곡절이 있다. 전 종손 김시인은 학봉의 직계후손이 아니다. 13대 김용환 종손이 후사가 없어 양자로 입적돼 종손이 됐다. 당시 김시인은 29세로 이미 결혼해 아들 둘을 둔 상황에서 학봉종가로 양자로 들어온 것이다. 보통 양자는 10세 전후에 입적되는 게 상례인데, 만년한 나이에 부인과 자식까지 데리고 온 처지의 양자였다. 그런 양자를 안동지역에선 둥주리(둥우리)채 옮겨왔다고 해 ‘둥주리 양자’라고 하는데, 김시인은 젊었을 적 이 호칭(?)으로도 많이 불렸다고 한다.

문중 ‘보중계’로 공부한 15대 김종길 종손
김종길 종손은 다섯 살 때 아버지 김시인을 따라 종가로 들어왔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따라 왔을 것이다. 그가 태어나 다섯 살까지 자란 곳은 지금은 임하댐으로 수몰된 안동시 임동면 지례의 언급마을이다. 그는 그 고향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추억한다. 김종길은 안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간다. 안동사범학교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사범학교를 나왔으니 교편생활을 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중에서 차종손인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종손인 만큼 더 많이 배워야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엄두도 못낼 처지였다. 문중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조금씩 거둬 등록금과 학비를 대줬는데, 그 돈으로 김종길은 대학을 마쳤다. 그런 식의 문중지원을 일컬어 ‘保宗契’라고 한다.

김종길은 차종손의 입장에서 대학생이나 직장인으로 서울에 있을 때도 주말이나 휴가 때는 거의 안동 집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차종손으로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삶을 산 것이다. 김종길이 정식으로 학봉의 15대 종손이 된 것은 2년이 채 안 됐다. 지난 2008년에 별세한 14대 종손 김시인의 3년 상을 마치고 ‘吉祭’를 치른 후에야 정식으로 종손이 됐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숙명적으로 종손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의 김종길은, 그러나 차종손으로서 아버지가 오래 종손 자리에 계신 덕에 서울에서 40년 직장생활을 무난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유능한 기업인이었다. 김종길은 삼보컴퓨터와 ‘삐삐’로 이름난 나래이동통신, 그리고 국내 최초의 인터넷 초고속서비스 회사인 두루넷 등 최첨단 산업업체의 CEO를 역임했다.

종손과 첨단기업의 CEO, 이게 잘 매치가 안 된다. 그러나 그는 종손 직을 위해 그 직을 미련없이 던졌다. 회한이나 미련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숙명적’이란 말로 그 당위성을 강조한다. 이것, 저것을 가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귀결점이었다고 강조한다. 종손으로서 대를 이어야 하는 도덕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鶴峰家 의 자부심과 ‘노블리스 오블리주’
김종길은 학봉가의 15대 종손으로서의 자부심이 남다르지만, 그 책무와 역할도 아주 중시한다. ‘충절과 의리’라는 학봉가 전래의 정신에다 아버지인 김시인 전 종손과 어머니 趙畢男 전 종부로부터 받은 가르침이다. ‘조상에게 욕되지 않게 처신을 잘 해야 된다. 문중 어른들을 잘 모셔야한다’는 것과 ‘검소해라. 부지런해라. 정직해라. 남한테 지라’는 지침이 그것이다.

김종길은 종손으로서의 책무 중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봉제사와 접빈객을 든다. 이것이야말로 선대서부터 쌓아 온 정신과 유업을 가장 잘 계승하고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종가처럼 제사가 많고 손님도 많은 집에서는 봉제사와 접빈객의 의미가 남다르다. 봉제사는 조상을 받드는 종가의 상사이지만, 제사를 통해 가문의 소통과 화합을 이루고 문화를 계승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접빈객은 정성껏 손님을 대한다는 배려와 보살핌의 정신이 항상 들어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봉제사도 접빈객도 항상 정성을 들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김종길 종손의 생각이다. 김종길 종손은 자식으로서도 그렇지만, 현 종손의 입장에서 아버지인 김시인 전 종손을 기리는 마음이 애틋하다. 김시인 전대인 13대 金龍煥 종손이 독립군에 자금을 대느라 집안을 숟가락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거덜냈기 때문이다. 그런 집안을 김시인 전 종손이 평생을 다 바쳐 다시 추스르고 일구어 반듯하고 든든하게 오늘의 종가로 일으켜 세운 데 대한 고마움이자 존경의 마음이다.

김종길 종손은 아버지가 다시 반석처럼 가꿔놓은 그 바탕 위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종가의 사회적 책무란 말하자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그는 물질만능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혼란한 사회현상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혼탁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누구보다 우선 종손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선현들이 물려준 정신과 문화를 계승해 반듯하고 바람직한 도덕사회를 이루고자하는 그의 소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가 인성교육과 도덕사회 재건을 기치로 내건 ‘博約會’ 활동에 수석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보태고 있는 것도 그러고보면 십분 이해된다.

 ‘박약회’는 전국적으로 4천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도덕운동단체로 전국에 25개 지회, 중국 청도에 1개의 지회를 두고 있으며 자녀 인성교육과 예절교육 등 도덕심 발양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김종길 종손은 종가가 도덕과 예절을 바탕으로 한 선비문화 실천에 제일 먼저 나서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실천에 그칠 게 아니라 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종가가 앞장서서 종가를 전통문화를 실천하는 도장으로 삼아, 일반 사람들이 체험하고 실습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이와 함께 전통문화와 관련된 아이템과 교재를 개발하는 한편, 전해오는 조상들의 미담이나 강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널리 알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김종길 종손은 이런 일에 항상 발 벗고 나서고 있다.

 현재 안동 도산서원 부설 ‘선비문화수련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도덕인성교육과 선비정신을 앞장서 가르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김종길 종손이 대구·경북지역 不遷位 위종가 종손 모임인 ‘嶺宗會’ 회장을 맡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문화를 진작하고 도덕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영종회’는 특히 생활환경의 변화 속에서 급속하게 바뀌는 전통의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이의 개선방향을 추구한다는 목적도 있어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전통문화의 고수도 중요하지만, 그 형식이나 절차는 옛날에 구애받지 않고 현실에 맞게 간소화하고 개선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종가의 가장 큰 제사인 불천위 제사도 포함되고 있는데 그 논의는 아직 진행 중이라고 한다. 김종길 종손의 이러한 사회적 활동에는 당연히 현 종부인 李點淑 종부의 내조가 뒤따르고 있다. 퇴계 이황의 眞城 이씨 가문 종손의 동생인 이점숙 종부는 경북과 대구지역 종가의 종부 모임인 ‘慶婦會’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종가의 살림을 사는 종부들의 지혜와 역할을 널리 알리는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경부회’ 초대회장 역임한 아내의 내조
김종길 종손을 이을 차종손은 아들인 김형호 씨일 것이다. 김종길 종손은 내 후대는 내가 모를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종손으로서의 길을 반추해보면 결국은 또 ‘숙명적’으로 김형호가 차종손이 될 것이다.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문학 공부(박사과정)를 하고 있는 김형호는, 서울로 가지 않고 안동대에서 한문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김종길 종손은 아들인 김형호 씨가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김시인 전 종손을 모시며 차차 종손으로서의 기본은 닦았을 것으로 내심 기대한다.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다. 금계의 우리말인 검재를 따 검재마을이라 부르는 곳이다. 학봉이 살았던 이 집은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는 바람에 학봉의 8세손인 김광찬이 영조 38년인 1762년, 이곳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종택을 건립했다. 그 후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전했는데, 이 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뒀다.

그게 지금의 邵溪 서당이다. 근년에 지은 5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정원의 안쪽에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 가옥은 ‘一’자형 안채와 사랑채, 익랑, 중문간이 연결된 ‘ㅁ’자형이었는데, 추가로 확장되면서 ‘巳’모양을 하고 있다. 그 바깥으로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과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이 대청이고 왼쪽 2칸이 안방이며 그 끝이 부엌이다.

왼편의 정침(제사를 지내는 등 거처하지는 않는 몸채의 방) 뒤쪽에 있는 사당은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구성 돼 있다. 운장각은 유물의 보관과 전시를 위해 세운 것으로, 학봉의 유품과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과 옛 문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운장각 남쪽에 풍뢰헌이 있다. 학봉종택은 지난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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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음 2015-12-09 00:02:22
왜란전에 황윤길이랑 같이 왜에가서 전쟁 날 것 같은지 알아보라고 시켰더니 황윤길(서인)이 전쟁 난다고 하니까 동인인지라 괜히 청개구리처럼 무조건 반대 의견내서 전쟁 안난다고 한 놈이 김성일인데. 나라 들어먹을뻔한 인물을 빛냈다니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