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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
  • 논설위원
  • 승인 2002.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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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토해내게 하는 것은 배고픔도 목마름도 아니고 사랑, 증오, 동정심, 분노 같은 것들이다.” 오래 전에 루소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한 말이다. 이른바 언어라는 것이 최초 욕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욕구, 즉 정념에서 왔다는 주장이다. 요즘 우리 정치와 삶의 각진 현실을 보면, 루소의 이 말은 고쳐야 할 것 같다.

배고픔이나 목마름과 같은 최초의 욕구를 닮은 ‘말’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兵風’ 공방을 비롯한 ‘더러운 政爭’의 한 가운데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정념’이 아닌 ‘욕망’의 말들이다.

“사실이라면 사퇴하겠다”라면서 검찰수사에 압력을 넣는 측이나, “그렇다면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측 모두 어떤 가혹한 굶주림의 표정을 띠고 있는 것처럼 비쳐진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랑이나 증오, 동정심과 분노 같은 것은 대상과의 거리를 의미한다. 이 거리감은 사실은 ‘자기’에 대한 성찰을, 느낌을 전제로 한다. 홀로 있는 ‘나’가 아니라 끊임없이 겨루고 어루만지는 ‘우리’가 있다.

하나의 원핵세포가 자신에게 침투한 ‘非자기’인 다른 원핵세포를 결국 자기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진핵세포로 진화했다는 학설(마굴리스의 가설)은 또 어떤가. 자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일부로 서서히 받아들이는 과정, 이를 통한 진화라는 자연의 드라마야말로 어떤 정념의 표현일 것이다. 이른바 ‘내공생(endosymbiosis)’이라는 저 오랜 공생의 관계는 인간이 이룩한 인위의 세계에 적잖은 시사점을 던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빛바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까. 정치의 세계에서는 ‘사회성’의 의미를 쉽게 까먹는 것 같다. 자기와 비자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기 진화를 해 온 박테리아의 삶의 관용은 차라리 원초적이라 치자. 國政의 파트너이자 정치적 이해관계의 공모자이기도 한 이들 정치인들과 그네들 주변에 포진한 무수한 ‘말들’의 몸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질병’의 증후를 심각하게 내보이고 있다.

‘대통령 병’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고약한 질병이다. 이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상대를 파트너로 보지 않고 물리쳐야 할 敵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의 입에서 넘쳐나는 말들은 사랑이나 동정어린 배려의 언어들이 아니다. 그것은 억누르고 해코지하는, 결국은 함께 自滅하는 피폐한 말, 서로를 가르고 毒을 내뿜는 말이다.

월드컵 이후 국민은 한층 더 성숙해졌다. 이제 국민을 상대로 한 ‘자멸의 연기’는 그쳐야 한다. 권력에 굶주리고 배고픈 말들은 식상할 뿐이다. 영혼도, 미래도, 희망도 없는 길거리 구걸 정치를 당장 치워라.

‘병역문제’는 검찰에 맡기고, 나라의 청사진을 크게 그리는 일로 돌아가야 할 때다. 굶주린 정치가 아니라 희망의 정치, 그것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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