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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영웅’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주역’은 일가였다
암태도 ‘영웅’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주역’은 일가였다
  • 최성환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ㆍ역사학
  • 승인 2013.04.15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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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28 한국 농민운동의 전설이 된 암태도

농경지가 발달한 임태도 풍경. 임태도는 대한민국 농민운동의 메카이자 각종 민중운동의 정신적 매개체가 됐다. 사진제공=전남 신안군
암태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다이아몬드 제도의 한축을 차지하고 있는 섬으로, 큰 바위 산이 많아 ‘암태(巖泰)’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기암괴석과 바다가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승봉산이 동쪽에 우뚝 솟아 있고, 매향비와 우실로 유명한 송곡마을을 감싸 앉은 박달산이 서쪽바다를 지켜주고 있다.

암태도로 가는 뱃길은 목포와 연도교가 놓아진 신안군 압해도의 송공항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25분이면 암태도에 도착한다. 암태·자은·팔금·안좌 4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돼 있어, 여러 섬을 한꺼번에 둘러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암태도는 섬이지만 어민보다는 간척을 통해 형성된 농지를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암태도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농민들의 소작쟁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펼쳐졌다. 그 중심에는 서태석(徐邰晳, 1885∼1943)이 있었다. 그는 1923년 12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불합리한 소작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주도했다. 서태석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암태도 주민들의 단결력은 대단했다. 소작쟁의가 발생하자 일본경찰은 지주의 편을 들고, 농민대표들을 모두 구속시켰다.

이에 맞서 암태도 주민들은 1차로 400여명, 2차로 600여명이 돛단배에 몸을 싣고 험한 바다를 건너 목포로 나갔다. 그들은 목포경찰서 앞에서 단식투쟁을 펼쳤다. 그 가운데는 노인들과 여성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암태도 사람들의 이러한 투쟁을 ‘아사동맹(餓死同盟)’이라고 표현했다. 굶어 죽기를 각오한 그들의 간절한 싸움은 각종 언론을 통해 상세히 보도됐고,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암태도 농민들을 응원하고 힘을 보태왔다. 결국 농민들의 요구는 관철돼 소작율은 낮춰졌고, 지도자들은 모두 석방됐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제하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한국사회에서 지금도 농민운동의 전설로 남아 있다. 이미 1969년 박순동에 의해 국내 최초 논픽션 소설로 작품화 됐으며, 송기숙이 1979년 <창작과비평>에 소설 「암태도」를 연재하면서 대중들에게 더욱 알려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암태도’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농민운동의 메카이자 각종 민중운동의 정신적인 매개체가 됐다.

암태도 면소재지 초입에 세워진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 전경이다. 사진=최성환

암태도 소작쟁의가 더 주목되는 이유는 그 중심인물들의 삶이 매우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박복영, 여장부 고백화, 지주이자 자본가였던 문재철 등 다양한 군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인물은 지도자였던 서태석이다. 그는 암태도 농민들의 영웅이었지만, 이후의 삶은 매우 불행했다.

서태석은 소작쟁의를 승리로 이끈 이후 다양한 방법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감생활과 극심한 고문을 경험했다. 감옥에서 출소 한 후 그는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정신분열증을 겪게 됐다. 더 이상의 활동이 불가능해진 서태석은 암태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 고향조차도 편안한 안식처가 돼주지 못했다. 그는 정신병자처럼 여기저기를 전전했고, 말년에는 동네 주민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태석은 누이가 살던 현 신안군 압해도의 어느 논둑에서 벼 포기를 움켜쥔 채 숨을 거두었다. 이것이 현재 알려진 농민운동의 영웅 서태석의 최후 모습이다. 사회주의 사상이 강했던 서태석의 활동 경력은 광복이후에도 선양의 대상이 아닌 금기의 대상이 됐다. 일가친척들이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암태도 사람들이 추모비를 세우는 것조차 제재를 받았다. 오랫동안 독립유공자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지난 2003년 8월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됐다.

서태석의 불행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몇 해 전 미국에 살고 있는 서태석의 친손녀(서정이)와 연락이 닿았는데, 그를 통해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발단이 됐던 인물인 박기옥이 그녀의 어머니이자 서태석의 며느리라는 사실이었다.

암태도 농민운동의 영웅인 서태석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인 박기옥이 한 가족이었다는 점은 그동안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박기옥 역시 매우 불행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고, 그 후손들은 광복이후 반공청년단체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아 결국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했다. 흔히 '친일파는 광복 후 득세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빌어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서태석 일가의 사례가 그러한 속설을 증명하는 것 같다. 심지어 박기옥의 경우는 아직도 국가유공자로서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올해는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역사적 의미가 재조명 되는 계기가 돼야겠다. 마침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에서는 설립 30주년을 맞이하여 30년 전 최초 공동조사지였던 암태도를 재조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소작쟁의와 관련된 사적지와 스토리를 발굴하는 일을 맡았다. 현재 암태도에는 소작항쟁 기념비와 서태석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보다 다양한 사적지가 밝혀지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된다면 암태도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또 언젠가 기회가 되면 미국에 있는 서태석의 손녀가 꿈에 그리던 암태도를 직접 방문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최성환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ㆍ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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