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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투스’와 ‘빈사의 사자상’에서 니체를 만나다
‘필라투스’와 ‘빈사의 사자상’에서 니체를 만나다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 승인 2013.04.15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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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 35 스위스의 루체른에서(2)

 

니체가 루 살로메와 만났던 '빈사의 사자상'. 우연이지만, 5월 11일 나는 이 빈사의 사자상 앞에 서 있었으니, 니체가 루 살로메에게 청혼해 다시 거절당한 '5월 13일'의 이틀 전인 셈이다. 사진=최재목
‘차라투스트라가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10년 동안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참 인간미 없는, 똥고집으로 가득 찬 말투하고는. 나는 필라투스를 내려오며 니체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을 음미한다. 니체가 말하는 ‘산’이 저 필라투스인가. 참 매력 없고 흉측하다. 총독 빌라도의 망령, 정신적 고독을 숨긴 ‘초인’ 같은데, 거기엔 ‘皆骨山’(겨울 금강산) 같은 풍류는 없고, 모든 가치가 파괴된, 몰락과 숙명만이 뼈를 드러낸다.

 

루체른의 호수는 저리도 맑고 푸른데 차라투스트라는 아름다운 호수를 등지고 하필 험준한 산으로 들어가 거기서 초연히 10년이나 죽치고 있었나. 그 깡다구는 ‘못 먹어도 고!’라는 ‘힘’을 향한 의지인가. 약자는 죽고 강자, 호전적인 것, 남성적인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인간이란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인간이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쳐 놓은 하나의 줄이다.…인간의 위대함이란, 그가 하나의 다리이지 결코 어떤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사랑스러운 점은, 그가 하나의 移行이요, 또한 몰락이라는 점이다.…인간의 생존이란 허무하면서도 항상 무의미하다.…나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존재의 의미를 가르쳐주고자 한다. 그것은 초인이다. 그는 어두운 구름과도 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번개이다’라고.

신은 죽고, 인간은 빛도 비전도 없이 암흑 속에서 음울하게 고름을 찔찔 흘리며 사는 존재이다. 거기엔 어떤 체계도 없고 오직 부정만이 있다. ‘그녀를 돌아다보니, 내 눈에 보인 건 오직 옆구리가 끈적끈적한, 고름으로 가득 찬 가죽 부대뿐!’(「흡혈귀의 변신」)이라는 보들레르『악의 꽃』(정기수역, 정음사, 141쪽)의 시구처럼 말이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려는 힘=번개=광기가 필요하다. 이육사의 시「광야」의,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처럼, 초인=차라투스트가 인간을 구원한다. 강자인 소수=주인은 노예=대중들을 인도한다. 인간은 자신의 노예적 운명을 무한히 긍정, 사랑해야하는데 그게 초인의 힘(권력)을 믿는 일이다.‘자기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10년 동안 조금도 지치지 않’는 것처럼, 수없이 되풀이 되는 영겁회귀의 고통?무의미함을 견디는 일이다.

니체는 26세 때 불치의 병, 매독에 걸렸다. 이 때문에 그는 혼란스런 삶 자체를 진지하게 철학해 간다. 매독 균이 번지는 자신의 고름이 질질 나는 몸에 대해, 미쳐가면서 狂氣만 푸른 삶을 꿰뚫어보게 된다. 몸에 깃든 초인은 오직 ‘강한 것들’, 몸을 갉아먹는 病과 菌 아니었을까? 악인, 야만, 정념, 독종, 고통의 영겁회귀만이 필라투스의 기암괴석처럼 빛난다. 인간의 모든 환상과 관념체계는 허구며 사기라니 절대적 도덕과 가치는 부정, 파괴된다. 남는 것은 유물적 現世일 뿐.

로이스강 가 카페에 앉아 카펠교를 바라보며 퐁두를 먹는다. 혀에 감기는 치즈처럼, 물결은 내 가슴으로 들어와 끝없이 되돌고 있다. 아! 퐁두는 넘 짜다. 반쯤 먹다 치우고 일어선다. 니체가 루 살로메와 만났던, 거의 죽어가는(瀕死) 사자상으로 가기 전, 나는 루체른 구시가의 북쪽에 위치한 무제크 요새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가를 따라 걸으면서도 강에서 눈을 못 뗀다. 어쩌면 물이 저렇게 맑은가. 부럽다. 요새벽의 감시탑에 올라 시내를 굽어보니, 한때 중세가 머물렀던 시간의 童顔이 슬쩍 드러난다. 아, 그 시절도 저러했을까?

꽃들이 줄지어 가리키는 요새벽 길을 따라 내려오니, 어느새 빈사의 사자 조각상 앞에 이른다. 덴마크의 조각가 토르발트젠의 조각품. 16~18세기 스위스는 여러 나라에 용병을 파견하여 국력을 쌓아 가는데,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8월 15일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일가를 경호하다 786명의 스위스 친위대가 목숨을 잃고 만다. 방패와 부러진 창을 부둥켜안고, 왼쪽 허리로 부러진 화살이 심장을 관통해 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사자는 목숨 바쳐 책임을 다한 스위스 위병들의 충성심을 칭송한 것인데, 비극이다.

니체가 이곳에서 다시 만난 루 살로메는 아름다웠을까. 로마에서 처음 그녀를 만나 넋을 잃었던 니체가 하필 여기서 그녀를 만났을까. 니체가 여기서 하고픈 말은 이런 것이었을까.‘회상해 보오, 내 님이여.//…파리 떼는 그 문드러진 배때기 위에서 윙윙거리고,/구더기의 검은 대열 거기서 나와,/진한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형상은 스러지고 이제 한바탕의 꿈,…//…내 눈의 별이여, 내 마음의 태양이여,/내 천사, 내 정열이여!//아무렴! 당신도 그러하리, 아름다움의 여왕이여,…꽃 피어 어우러진 풀 아래, 백골 사이에,/당신도 가서 곰팡이가 슬 무렵엔.//그때엔, 오, 아름다운 임이여 말하오,/당신을 입 맞추고 먹어들 구더기에게/내 옛사랑 썩어문드러져도 그 형상과 거룩한 精華는/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노라고.’(「송장」,『악의 꽃』, 45~46쪽)

니체와 루 살로메는, 잎이 있을 때에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때에는 잎이 없는 相思花였다. 청혼을 거절당한 채 며칠간 그녀와 지내며 니체는 홀로 헛물을 켜며 애간장을 끓였으니, 빈사의 사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직감했으리라.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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