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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해석보다 ‘주해’ 과정 거쳐야 학문의 성숙 가능하다
번역·해석보다 ‘주해’ 과정 거쳐야 학문의 성숙 가능하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4.09 10: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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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한 안재원 서울대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로마의 학문은 바로의 전통을 계승한 플라쿠스와 같은 문법학자들의 연구를 기반으로 체계화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학문 서적을 저술하거나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학문과 사상, 문화를 수입할 때 발생하는 언어 충돌을 해결해야 했다. 라틴어 문법을 정비해 라틴어로도 학술 용어와 술어들을 만들 수 있도록 언어적 기제와 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문법학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마의 문법학자들』중에서)

학문이 전파되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언어문제이다. 그래서 고전이 수입되면, 내용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도록 번역이 기초 작업이 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서로 다른 견해의 해석들이 생겨나며 담론이 풍부해지는 것이 수입된 학문의 성장과정이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학문 1, 2세대들이 담당했던 번역과 해석의 과정에 빠진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 출간됐다.‘ 註解’과정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는 안재원 서울대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철학)는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문명텍스트 총서 15번째 책으로『로마의 문법학자들』(수에토니우스 지음, 한길사 刊)을 펴냈다. 안 교수는 이 책이 서양고전에 대한 본격적인 국내 첫 번째 주해서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주해는 원문을 읽는 데 이해가 안 되는 낱말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정도의 의미로 국한돼 있었다.‘ 주해=주석’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 학계의 현실. 척박한 국내 주해서 발간 실태는 비단 서양고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명학 성균관대 교수(한문교육학과)는 우리 역사의 대표적 기록물인『삼국유사』조차도 올바른 주해본이 국내 학자들에 의해 발간된 것이 없다고 말하며, 오히려 1970년대 일본학자들이 윤독하며 펴낸『삼국사기』의 주해서가 민속학, 문헌학 등의 충실한 고증자료를 덧붙여 정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주해서라고 말했다. 동양고전에 있어서도 국내 학계에서 주해 작업을 등한시 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중국의 경우 이본이 많은 동양고전뿐만 아니라 서양고전을 번역함에 있어 철저히 주해 중심이고, 일본의 경우 번역이 강세를 띠기는 하지만 주해 분야 역시 탄탄하다.

‘주해=주석’의 학계의 인식 재고돼야

안 교수는 번역작업이 땅 위 고구마순이라면 주해 작업은 땅 속에 숨은 고구마를 캐내는 작업이라고 비유했다. 기본적으로 고전의 주해는 이 책과 그 속의 문장, 단어가 가진 역사적 맥락을 밝혀주는 작업이라고 말하는 안 교수는 플라톤이 한 말이 이전 호메로스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개념화가 된 것인지를 이어주는 작업이라고 주해의 예로 들었다.

원래 고전 자체는 문·사·철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작품이 갖는 문명사적 특징을 찾아주고 그 틀을 확립하는 과정이 바로 주해인 것이다. 분과학문체제인 오늘날 학계 현실에 비춰 볼 때, 주해작업에 대한 관심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

왜 주해가 중요할까. 안 교수는 한 분야의 학자들을 양성하고자 할 때, 표준적 의견이 된 주해서를 번역해 놓으면, 후속세대들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그 시대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고 세계 학자들과 공동연구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주해가 끝나고야 서로 다른 해석들이 나올 수 있기에‘학문의 선진화’를 위해서 연구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교수들처럼 외국에 유학가서 어떤 주의, 이론, 주장 하나를 공부하고 국내에 돌아와 그걸 풀어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학문적 자생력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주해의 네 가지 의무

안 교수는 주해의 네 가지 의무를 언급했다. 첫 번째 가 그 책과 관련된 역사를 밝혀주는 것, 두 번째가 그 책에 대한 당대 해석사(학자들의 이슈와 담론)를 정리해 주는 것, 세 번째가 고전에 얽혀 있는 학문이 다른 학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융합의 다리를 놔주는 것, 마지막으로 그 책속에 있는 내용과 방법론 등이 우리에게 수입된 수용사와 우리 연구의 발신이 가능한 수용가능성에 대해 말해줄 것이 바로 그 의무이다.

이번에 발간된『로마의 문법학자들』은 베를린아카데미의 아리스토텔레스 주해 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 안 교수는 수에토니우스의 이 전기 모음에 라틴어 원문과 문헌 전승에 대한 비판장치와 더불어 상세하고도 충실한 주해를 덧붙임으로써, 이 책을 ‘우리말로 편집된 원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책에 서술된 26명의 문법학자들은 대부분 그리스 노예 출신이다. 척박했던 로마 시민들은 정신문화는 그리스 텍스트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됐는데, 노예 신분이던 그리스 학자들의 교육과 번역이 바로 학문 발전에 기여한 것이다.

학문사적인 맥락을 짚어내는 대가 뒤에는 수없는 이름 없는 학자들의 수고가 있었다. 이번 주해 작업이 한국 학문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안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이나 HK연구단의 지원사업이 치중됐던 번역 분야를 넘어서, 주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수에토니우스는?로마의 전기 작가이자 역사가.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밑에서 도서관장, 고문서 보관자, 문화 문제에 관한 황제의 고문 등을 맡았다. 카이사르에서 도미티아누스까지 로마 황제 12명의 생애를 다룬『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이 대표작이다. 그 밖에 시인, 역사학자, 수학자, 문법학자 등 로마의 유명한 문이들에 대한 전기를 모은『뛰어난 사람들에 관하여』를썼는데, 그중『로마의수사학자들』은 대부분 내용이 유실됐고,『 로마의문법학자들』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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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2014-08-25 09:50:23
요즘 제가 고민하던 문제를 속시원히 제시한 기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