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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박달재 옆 그가 禪을 노래하는 이유
천등산 박달재 옆 그가 禪을 노래하는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13.04.0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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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첫 전시회 연 이철수의 판화세계

 

광주시립미술관(관장 황영성)이 이철수 목판화 32년을 결산하는 「아이들 뒤따라 올 텐데」展을 오는 5월 5일까지 상록전시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이철수 목판화 32년 동안 만들어진 대표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가히 이철수의 목판화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이철수 작가의 초기작품인 1981년의 투쟁적 민중미술의 목판화부터 최근에 일상에서의 평화와 존재를 나누고자 하는 禪적인 목판화까지 모두 128점의 목판화가 전시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변길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에게서 이철수의 판화세계를 들어본다.

이철수 작가는 혈혈단신으로 이 시대의 대표적 판화가가 된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작가다. 그는 항상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미술가였다. 본디 판화의 출발이 민중에 있었으니 사람과 삶에 대해 관심이 있던 그가 택했던 판화는 그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현재 사는 곳은 충북 제천. 노래로만 듣던 천등산 박달재 옆이다. 그 옆으로 다랫재가 있어 그가 사는 마을은 커다란 산에 둘러싸인 분지이다. 가도 가도 첩첩산중인 이곳에 그는 1986년 들어왔다. 포장도로도 없던 때다.

 

광주에서 제천까지 그를 처음 찾아 간 날 속없이 여쭤봤다. “지금은 산 사이로 고속도로가 뚫려있어 다행입니다. 선견지명이 있으시네요.” 선생 왈, “선견지명이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뚫릴지 몰랐습니다.” 아뿔사, 그가 여기 들어온 이유도 모르고 함부로 도시인의 시각으로 말해버리고 만 것이다. 모두가 도시로 나가던 그때 그는 거꾸로 농촌을 찾았다. 모두가 편리함을 찾던 그때 그는 불편함을 찾았다. 그 속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새기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의 판화를 크게 세 개의 시기로 구분했다.

-1981-1989 시대의 아픔을 같이하다: 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1년 서울 관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어 서울의 봄에서 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시대적 좌절감을 표현한 것이 그의 판화인생의 시작이었다. 당시 민중미술계라는 것이 서울의 ‘현실과 발언’이나 광주의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등 미술대학이나 미술인들의 소집단 운동으로 이뤄졌었다는 사실과 비교해볼 때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은 그 당시 그의 작품제목처럼 ‘북치는 앉은뱅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첫 개인전에서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미술언어가 자신의 예술적 목표’라는 점을 선언했고, 이는 이후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반영된 예술사상이 됐다. 홀로였던 그는 첫 번째 개인전만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아 당시 민중미술계의 대선배들이던 오윤 등 ‘현실과 발언’ 작가들을 만나 이후 그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게 된다. 또한 빈민촌 교회의 벽화제작에도 참여했는데, 이때 빈민탁아소를 운영하던 이여경 여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이현주, 윤구병, 양성우, 이오덕, 권정생 등 유명 작가들의 200종이 넘는 책의 표지와 삽화를 그려 목판화의 대중화에 있어 큰 역할을 했고, 이는 이후 종교와 문학, 민중과 미술이 함께 하는 그의 예술의 큰 특징이 됐다. 그는 1983년 경북 의성 깊은 산골짝으로 들어가 3년을 살았다. 농민같은 삶을 실천하려 했다. 1985년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동학, 한반도, 호랑이 등 민족적 소재를 사용했다. 1986년 제천으로 이사했다.

-1990-2000 자기를 성찰하다: 청년의 열정으로 뜨겁게 보낸 80년대 말인 1989년 유럽 순회전을 기점으로 그의 세계관은 바뀌게 된다. 20세기 초 궁핍한 민중을 표현한 참여미술의 선각자 케테 콜비츠(1865~1845)가 정작 그의 고국인 독일에서는 유용성이 없는 지나간 흔적에 불과한 존재로 대접받는 것을 본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해온 민족적 민중미술에 대한 반성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로까지 이어졌다. 무명 시절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이현주 목사 등 기독교와의 만남, 그리고 동시에 갖고 있었던 불교에 대한 생각 등은 그의 예술을 꽃피우게 하는 정신적 토양이었다.

 

법연스님과의 만남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불교적 성찰의 깊이를 더해 주었고, 1990년 전시회를 거쳐 나온 이철수 불교판화 모음집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는 이철수가 협소한 민족·민중의 고정된 틀에서 불교적 생명사상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진화했음을 증거했다. 물론 불교적 禪의 세계가 그의 작품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어떤 한 종교에 매몰된 편협한 것은 아니었다.

禪은 그의 소재의 일부분이었다. 禪도 세상의 일부일진데 어찌 그에서만 머물 수 있을까. 그의 작품에는 그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민족에 대한 애정, 사람에 대한 애정, 자연에 대한 애정이 그의 주요 소재를 이뤘던 것이다. 쪾2001-2013 나무에 새긴 마음: 2000년 11월 『이렇게 좋은 날』(학고재)에서 그는 그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다짐한다.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성내고 다투지 말아야지. 힘 앞에 고개 숙이지 말아야지.

가난하게 살아야지. 세상을 외면하지 말아야지.” 그의 작품이 곧 그의 사람됨이고, 그의 인생이 돼버린 경지다. 1990년대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성찰을 마치고 그는 낮은 자세로 일상의 아름다움을 나무에 새겼다. 2002년 풍수원 성당에 ‘십자가의 길’을 제작한 것은 그가 걷고 있는 길이 예수나 부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남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이기도 했다.

 

 

대중과의 만남은 그의 작업인생에 있어 일관된 흐름이었다. 2002년 시작된 그의 나뭇잎편지는 교통도 불편한 시골에 사는 그가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수단이었고, 봉사였다.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받아보는 그의 나뭇잎편지는 그가 매일 일기처럼 새겨 아침마다 보내주는 것이다. 이 나뭇잎편지는 엽서 산문집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등으로 발간됐는데, 그 제목은 그의 생각을 말해준다.

2005년 그는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을 모은 전시회인 「작은 것들」(가나아트)전을 개최했다. 2011년 그의 화업 30주년을 기념한 전시 「새는 온몸으로 난다」(관훈갤러리)전이 열렸다. 전시제목은 1981년 초기의 뜨거운 민중미술부터 2011년 30주년을 기념한 전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문장이었다. 오는 5월 5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열리는 그의 초대전은 어지러운 정치와 사회에 대해 그가 느끼는 마음을 작품으로 은유한 전시회다. 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에서 여는 그의 첫 번째 전시회의 부제는 ‘아이들 뒤따라 올 텐데’이다. 이 부제는 시대의 서늘함에 대한 그의 예술적인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변길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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