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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따라 진퇴 결정된 ‘국립 서울대 총장’ … 그들은 어떤 역사를 만들었나
‘정권’ 따라 진퇴 결정된 ‘국립 서울대 총장’ … 그들은 어떤 역사를 만들었나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4.08 1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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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서울대 총장들의 面面

 

1946년 개교한 국립 서울대는 현재의 오연천 총장을 포함해 이제껏 25명의 총장을 거쳤다. 초대 총장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었다. 해방과 함께 진주한 미군의 군정으로 통치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국립 서울대 설립에 관한 법령’에는 이사회에서 자격 있는 한국인을 천거해 본인의 수락을 받아 총장으로 임명하게 돼 있었지만, 군정 기간 중에는 군정장관이 임명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어 당시 미군 대위로 군정청에 근무하던 법학박사 출신의 해리 앤스테드 대위가 군정장관 임명에 의해 첫 총장이 된 것이다.

 

한국인 첫 총장은 앤스테드 대위를 이은 이춘호 박사다. 앤스테드 총장은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서울대 안팎의 반발을 받자 선임 1년 2개월 만인 1947년 10월 이 박사에게 총장 자리를 넘겼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재직한 이 총장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다. 1949년 4대 총장을 지낸 최규동 총장도 역시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된다.

첫 총장은 미군 대위 엔스테드
역대 서울대 총장들 가운데 화제를 남긴 총장들도 많다. 그 가운데 ‘쌍권총 총장’이란 별명으로 불린 9대 유기천 총장(1965~1966)에겐 일화가 많다. ‘쌍권총 총장’이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한·일 회담 반대가 지식인들과 대학가를 풍미하던 당시 ‘어용총장’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학의 자유를 수호하려 분투했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데모 학생 처벌을 자율적으로 엄하게 하면서 그 명분으로 학내 군대 투입을 저지하려던 유 총장의 노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약속 위반으로 좌절되고 이내 사임하게 된다. 이때 신변 위협을 느낀 그가 동대문경찰서에 권총 소지 허가 신청을 낸 것을 두고 언론에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이다.

총장직에서 사임한 유기천은 1971년 봄 강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면서 중앙정보부가 체포에 나서자 1972년 1월 미국으로 망명한다. 13대 윤천주 총장(1975~1979)은 유 총장과 반대로 대표적인 친 박정희 노선이었다. 5·16 군사쿠데타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면서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때 사무총장을 지냈고, 1964년 문교부장관과 1973년 부산대 총장을 거쳐 1975년 서울대 총장에 임명됐다. 친 박정희 성향으로 서울대 총장 시절 학생들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다. 1975년 11월, 사회대 학도호국단 사열식에서 총장에게 향하는 ‘받들어 총’ 구호가 아홉 번이나 반복됐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7대(1985~1987) 박봉식 총장도 친정부적이라는 이유로 졸업식에서 축사를 읽는 순간 2천여 명의 졸업생이 퇴장하는 노골적인 야유를 받았다. 박 총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 산실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입법위원을 역임한 경력이 총장 재임 중 낙인으로 따라다녔다. 이에 비해 14대 고병익 총장(1979~1980)은 학생들의 4·19혁명 기념식에 참가해 연설을 할 정도로 학내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 집회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시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물러난다. 21대 선우중호 총장(1996~1998)은 서울대 역대 총장 중 유일하게 불명예 퇴진을 당한 총장이다.

딸이 고액과외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우 총장은 또 학생들로부터 ‘레드 콤플렉스’를 조장한 총장으로 비난받았다. 1986년 북한의 금강산댐과 관련해 이 댐을 북한이 무너뜨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발언이 그 단초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선우 총장의 이 발언을 받아들여 ‘평화의 댐’을 지었지만, 뒷날 예산 낭비라는 지적을 받았다.

학문과 정치 사이에서
24대 이장무 총장은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비난 속에 총장 임무를 수행했다. 祖父가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로 일컬어지는 이병도이고, 이병도와 이완용이 질손 관계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20대 이수성 총장은 정치적 경력이 가장 많고 화려하다. 하지만 낙선의 연속이다. 이 총장은 1995년 12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정계에 발을 디딘다. 1997년 총리 퇴임 후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이어 2000년 김윤환, 이기택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 제1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한다. 이어 2007년 17대 대선에 또 다시 출마했다가 중도에 후보직을 사퇴하고 정동영 지지를 선언하지만, 정동영이 낙선하면서 그의 정치인생도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이수성 총장 외에 16대 이현재 총장이 1988년 노무현 정부에서, 그리고 23대 정운찬 총장이 이명박 정부에서 각각 국무총리로 발탁됐다. 정 총장은 총장 재임 중 ‘고교 평준화 재고’와 ‘대학 자율화를 위한 본고사 시행’을 주장해 교육부와 대립하기도 했다.

그는 직선제 총장으로는 처음으로 임기를 채운 총장으로 기록됐으며, 서울대를 세계 100대 대학에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학교는 물론 대중들의 인기를 많이 받았다. 서울대 총장은 직선제로 선출된다. 총장직선제는 1991년 민주화 추세에 의해 도입된 제도다. 그 전까지는 서울대 총장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임명직이었다.

서울대를 포함해 전국의 모든 국립대학이 그랬다. 서울대 첫 직선제 총장은 19대 김종운 총장이다. 김 총장은 1991년 처음 치러진 총장 직선제 선거에서 과반 이상을 득표해 초대 직선제 총장이 됐다. 당시 선거에는 서울대 전 교수의 90.7%가 투표에 참가함으로써 직선제 총장선출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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