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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공원’이 간직한 기억들 … 人材를 관악으로 옮겨간 까닭은?
‘마로니에 공원’이 간직한 기억들 … 人材를 관악으로 옮겨간 까닭은?
  • 교수신문
  • 승인 2013.04.0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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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19_ 서울대(동숭동·관악)

 

▲ 동숭동 서울대 전경이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젊은이의 거리,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에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공원의 광장 중앙에 있는 ‘서울대학교 遺趾記念碑’는 그 곳이 과거 서울대의 본부와 문리과대학, 법과대학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공원의 오른 편에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이 눈에 띠는데 1931년 10월 준공돼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서울대 본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1972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진흥원의 청사로 사용됐고 현재는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1981년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며 대학로라는 이름을 설명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이름만 남아있는 동숭동 캠퍼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센 강으로 부르던 학교 앞 대학천과 미라보 다리로 부르던 그 위의 다리 그리고 누가 심었는지 명확치 않지만 캠퍼스의 명물이 된 마로니에 나무로 상징되고 기억될 뿐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대학교로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교육 주권도 우리에게 돌아와야 했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에 그 실질적인 권한이 넘어갔다. 미군정은 경성제국대학의 행정사무를 접수하고 교명을 경성대학으로 개칭했다. 미 군정청 문교부는 1946년 7월 경성대학과 9개 관립 전문학교 및 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해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국대안)’을 발표한다.

이 안을 추진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초대총장에 법학박사였던 앤스테드(Ansted)대위가 임명됐다. 그 후 일방적이고 성급한 국대안에 반대하는 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됐다. 교수들의 사직, 학생들의 동맹휴학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다가 제적학생들의 조건부 복교와 제2대 총장으로 이춘호가 선임됨으로써 국대안 파동도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여러 학교를 통합해 종합대학교를 발족했지만 단과대학들은 기존의 건물과 캠퍼스를 그대로 사용하다보니 학교는 여러 군데로 나눠져 있었다. 대학본부와 문리과대학, 법대는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가 있던 동숭동 캠퍼스를 그대로 사용했다.

해방 후 행정 조치로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을 소멸시켰지만 새 종합대학교의 중심은 그 자리에 머무르며 시설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음은 공간적 역설이다. 해방 후 우리사회가 식민잔재를 청산해야했기에 경성제국대학은 그 흔적을 감추고 잔재를 청산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국립서울대학교가 경성제국대학의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근대학문 수용과 발전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유일한 근대적 종합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교의 역할과 영향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일제의 식민권력과 근대지식이 어떻게 상호 결합해 제도적으로 지식권력을 창출했는가를 주목하는 연구들이 진행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개교한지 4년이 지나 겨우 뿌리를 내리려던 서울대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 관악으로 이전하기 위한 기공식 장면이다. 사진=서울대자료실

피난을 떠난 학생들은 각 지역에 설치된 전시연합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수업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런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의지와 교수들의 열정은 더욱 뜨거웠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학교의 시설복구와 교육환경 개선에 많은 재원이 필요했으나 정부재정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다행히 미국원조기관으로부터 30만 달러를 지원 받았다.

특히 미국 미네소타대가 주관한 서울대 재건과 부흥 계획인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1954~1962년 사이에 1천만 달러에 가까운 금액을 지원했다. 교수진의 재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한 장단기 연수와 유학 프로그램을 비롯해 학교 건물과 시설의 복구, 수업과 연구 기자재 도입 등을 통해 학교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과, 농과, 의과 등 이공계통에 집중적인 지원이 이뤄져 이들 분야의 학문수준을 빠른 시간 내에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1960년대 한국 공업화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대가 한국을 대표하는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상대적 소외와 미국 일변도의 학문 경향 고착은 지적돼야 할 문제였다.

관악 캠퍼스 시대의 두 얼굴
4·19와 5·16 등의 정치·사회적 격변을 겪고 1960년대 서울대는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한다. 우선 캠퍼스 통합계획이 여러 차례 발표됐다. 동숭동과 연건동 그리고 수원에 모든 단과대학을 이전하려는 종합계획이 수립됐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태릉이나 신갈로의 이전도 검토됐으나 여러 난점으로 인해 백지화되고 말았다. 결국 1970년 관악골프장이 있던 곳에 종합캠퍼스를 건설하기로 결정났다.

빠른 시간 내에 종합캠퍼스 마스터플랜이 완성되고 1971년 기공식이 열렸다. 원래 1973년 9월부터 이전하려고 계획했으나 공사가 지연되면서 1975년 1월부터 이전이 시작됐다. 연건캠퍼스와 수원캠퍼스를 제외하고 1980년 공과대학을 끝으로 이전은 마무리됐다. 명실상부한 학문연구의 중심이며 뛰어난 인재들을 교육시키는 서울대의 관악 캠퍼스 시대는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계기가 됐다. 문리과대학이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분리되는 등 전체적으로 교육단위가 개편됐고 입시제도의 변화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의 변화에는 다른 시각이 존재했다.

끊임없는 시위의 온상인 문리대와 법대를 관악산 골짜기로 몰아넣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관악파출소로 상징되듯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젊은 지성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시도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대 이전 후 남겨진 공간의 일부는 매각해 종합캠퍼스 건설자금으로 충당됐으나 문리과대학 등 다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주택공사가 문리과 대학과 사범대학 부지를 매입해 아파트 건설을 추진했으나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동숭동 캠퍼스의 땅은 일반에 매각됐다. 문예진흥원이 매입한 본관 건물만 보존됐고 1천200여 평의 부지에는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됐다. 샘터사의 신사옥과 화랑, 도서관 등이 건립되면서 이곳은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공간의 활용을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대학교육의 발상지로서 동숭동 캠퍼스가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장소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이 갖는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동숭동 캠퍼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다양한 주체들의 기억방식과 상징적 영토화와 재영토화 그리고 보존과 개발의 문제는 다른 공간에서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번 지워진 흔적과 파괴된 공간은 다시 복구하기 힘들다는 사실일 것이다.


류지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철학
필자는 프랑스 릴3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논문으로 「베르그손과 르페브르」, 「로컬리톨로지를 위한 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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