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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너지 정책이 빚은 人災 성찰 … 새로운 일본과 동아시아의 평화 모색도
국가에너지 정책이 빚은 人災 성찰 … 새로운 일본과 동아시아의 평화 모색도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4.08 1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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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태평양 연안에서 발생한 진도 9의 지진은 내륙으로 몰려드는 9.3m 높이의 쓰나미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대표되는 전례 없는 대재앙을 일으켰다. 파악된 사망자 수만 1만5천 명이 넘는 동일본대지진은 물적·인적피해를 넘어 일본 사회변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不問可知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두 번째 겨울을 지나온 지난달, 약속이나 한 듯 동일본대지진관련 서적이 잇따라 출간됐다. 정부의 피난 지시를 거부하고 치매에 걸린 아내와 노모를 모시고 자택에 머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삶을 기록했던 사사키 다카시 전 도쿄준신여대 교수(스페인사상사, 73세)의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형진의 옮김, 돌베개 刊), 서울대 일본연구소(소장 박철희)의 장기 프로젝트 첫 번째 결과물인 『현장에서 바라본 동일본대지진』(한영혜 엮음, 한울아카데미 刊), 마지막으로 3·11 이후의 삶에 대한 비전문가 3人의 좌담을 엮은 『후쿠시마 이후의 삶』(한홍구,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반비 刊)이 그것이다. 이 세권의 책에 동일본대지진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선, 학계의 분석, 그리고 지성인의 성찰이 씨줄과 날줄처럼 묘하게 얽혀있다.

편의주의적 행정부와 직장포기자들

먼저 다카시 교수의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의 치열한 고투의 기록을 보자. 다카시 교수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하고 정부의 행정 편의주의적인 피난 지시를 거부한 채, 10년 전부터 연재하던 블로그(‘모노디아로고스’-스페인 사상가 우나무노가 만든 말로 ‘독백’을 뜻한다)에 하루하루 치열한 고투의 과정을 기록한다. 3·11 사고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수많은 원전 관련서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다. 저자는 자신이 재난지역에서 직접 겪은 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국가적 대재앙에 맞선 한 개인의 깊은 고뇌를, 오랜 연륜에서 묻어나는 유머를 잃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행정부는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지점으로부터 20km 권역을 옥내대피지역, 30km 권역을 자발적 피난지역으로 설정했다. 다카시 교수의 집은 25km 떨어진 옥내대피지역이었지만, 주민 3만 명 중 80%가 정부를 불신해 자발적으로 대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저자는 파괴되지 않은 자신들의 가옥이 더 안전함에도 방사능 수치가 6배나 더 높은 대피소에서 자발적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방사선으로 인한 피해를 아무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불안감 때문에 사망하거나, 간병인이 피난을 가서 사망하는 환자들이 발생하자 저자는 “그 누구도 아무 말도 안 하지만 명백한 과실치사에 해당하는 범죄가 아닌가?”라며 정부와 시의 안이한 조치에 분노한다.

그는 블로그를 통해 일본 국민들에게 실상을 알리기 시작한다. 30km의 저주가 두려워 옆 마을까지 온 물건을 미나미소마까지 배달하지 않는 바보 같은 일본의 우편당국과 서비스 제일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던 택배회사들을, 자못 심각한 표정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들로 싸구려 센티멘털리즘에 빠져있는 미디어들을, 환자를 버리고 도망간 의사들과 완전방호복을 입고 들어와서도 물 네 번 뿌리고 철수한 자위대들을… 다카시 교수는 이들을 직장포기자로 명명하며 강도 높은 비판의 날을 세운다. 대지진 이후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저자는 말한다. 현 정부도, 지금의 행정당국도 아니라고. 일본인에게 참된 나라는 선조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는 이 아름다운 대지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는 2주가 지나 병원으로 돌아온 의사, 과자를 만들어 팔며 수익금을 시에 기부하는 젊은이, 집수리를 도와주는 건축사들이야말로 ‘나락의 밑바닥’에서 마을을 재건하는 희망의 씨앗이라고 말한다.

원전사고는 어떤 변명도 공허하게 만드는, 국가 에너지정책이 빚어낸 틀림없는 人災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야, ‘나라’는 일의적으로는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고,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많은 사람으로 이뤄졌다는 귀중한 깨달음을 제시한다.

반면, 『현장에서 바라본 동일본대지진』은 동일본대지진 문제를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일본의 열망과 연결시켰다. 경제 침체의 장기화, 인구 감소, 고령화, 지역 및 계층 간 격차 확대 등의 사회적 문제처럼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일본의 현 상황에서 피재지 부흥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 재생’, ‘일본 부흥’의 관점에서 부흥의 그랜드 디자인을 논하고 있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2011년 4월 1단계 연구로 도호쿠 피재지의 지역성과 생활세계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도쿄, 고베 현지조사에 나섰고, 지난해 1월에야 도호쿠 피재지 현지조사가 실행됐다. 지진 발생 10개월이 지난 시점에 현지조사에 착수했기에, 라이프라인은 대체로 복구됐고, 최소한의 기본 생활이 가능한 상태였다고 서울대 일본연구소팀은 회고하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의 벽

6편의 논문과 1편의 현지조사일지, 부록으로 2012년 도호쿠 지방 현지조사보고서가 담긴 『현장에서 바라본 동일본대지진』에서 조아라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는 “재해의 부흥은 단순한 재해 대응의 차원을 넘어서서 종합적인 지역개발의 비전과 정책 하에서 추구돼야 하고, 지역 주체들간의 합의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현재 도호쿠의 관광정책이 피재지라는 점을 차별화해 관광객을 단기적으로 유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비전문가들이 2년여의 기간에 걸쳐 나눈 좌담을 책으로 엮은 『후쿠시마 이후의 삶』은, 핵문제의 해결을 이른바 전문가 집단에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그 출발점이었다. 핵무기든, 핵발전소 사고이든 간에 일단 문제가 터지면 그 피해를 입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광범위한 일반 대중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부분은 저자들이 후쿠시마 사고 자체에 대한 임상적 진단에 머물지 않고, 20세기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되짚으며 한일의 정치적 흐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한·미·일 동맹의 방향, 원전과 기지 문제의 공통성, 원전과 윤리, 나아가 일본 천황제 및 평화 헌법과 원전의 관계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원전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전 사고지인 후쿠시마, 스리마일 섬과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증언 대회가 열린 합천비핵화평화대회, 원전 문제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기지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제주 강정 마을, 그리고 오키나와 주요 현장을 답사한 이유다. 세 학자는 역사학, 철학, 예술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다. 핵에 대해서는 비전문가인 이들이 2년 여 논의를 하며 공감한 부분은 ‘평화에 대한 실천적 희구’이다.

이들은 정치가, 관료, 기업, 그리고 미디어까지 이른바 ‘원자력 마피아’들이 쳐놓은 전문성의 벽을 넘는 것이 원전 문제의 시작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야스쿠니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인 ‘희생의 시스템’이 원전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원전이 포기되지 않는 이유로 ‘원전이 핵무기와 일란성쌍둥이’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기치가 사실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일갈이다.

또한 이들은 제주가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 4·3 이라는 학살이 일어난 현장으로 대한민국의 제한적 정당성을 드러내는 장소이고, 오키나와 역시 주일 미군의 75%가 밀집된, 존재 자체로 일본이 전후 추구해온 평화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우경화와 퇴행의 시대에 근본적으로 원전과 평화 문제를 좀 더 실감 나게 우리 삶의 문제로 설명해내지 못했다는 지식인들의 솔직한 반성은 동일본대지진 2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어떤 ‘희망’으로 평화를 실천해야 할지 그 좌표를 모색토록 한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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