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4:10 (토)
에델바이스와 하이디의 ‘순수’에서 아미 나이프의 ‘자기 수호정신’까지
에델바이스와 하이디의 ‘순수’에서 아미 나이프의 ‘자기 수호정신’까지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 승인 2013.04.01 1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34) 스위스의 루체른에서(1)

루체른 리기 산록의 아름다운 꽃 모습. 사진=최재목
아, 알프스 산록엔 희고 노란 꽃천지일 거고, 최고봉 몽블랑은 희디흰 눈천지일 터. 5월 초, 호기심에 가슴이 부푼 채, 암스테르담에서 출발, 독일을 거쳐 남하. 바젤에 잠시 들렀다가, 스위스 중부 호반 도시 루체른으로 간다.

스위스 건국에 관련된 인물 빌헬름 텔 전설의 무대인 피어발트 슈테터湖(보통 ‘루체른 호수’로 불림)의 서안, 고타드 고개에서 발원하는 로이스강의 양쪽 연안을 연결하는 나무다리인 카펠교. 그 너머로 솟은 알프스 영봉 해발 2,132m의 필라투스. 그리고 리기ㆍ티틀리스 등의 봉우리가 감싼 도시. 外侵이 별로 없었던 천혜의 요새로 유럽 중세도시 분위기를 잘 간직한 루체른. 이곳에 며칠 머물면서 나는 취리히, 융프라우요흐, 인터라켄 등 여러 곳을 둘러볼 예정이다.

주위 사람들은 루체른의 리기산 정상에 올라 꼭 패러글라이딩을 해보라 한다. 겁 많은 나로서는 엄두를 못 낼 일이나 일단 접수. 그리고 빵을 꽂은 가늘고 긴 포크를 요리조리 저어서 입에 넣는, 낙농 국가 스위스의 명물로 원래 산악지방의 겨울철 요리 ‘치즈 퐁듀’도 먹어보란다.

출발 전부터 나는『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골마을에서 할아버지와 사는 순수한 소녀 하이디의 이야기. 스위스의 소설가 요하나 슈피리(Johanna Spyri, 1827~1901)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1974년 일본에서 제작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영화다. 일본에서 방영된 뒤 유럽 각국에 수출됐고, 한국에서는 1976년 방영된 작품이다. 내가 스위스를 동경한 것도 바로 이 영화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 카펠교. 루체른의 랜드 마크다. 중간에 팔각탑 바서투름이 보인다. 바서투름은 예전에 요새와 감옥, 보물창고 등으로 쓰였다. 사진=최재목

기차가 스위스에 들어설 무렵 뒷자리의 나이든 유럽 관광객이 나직하게 불러주는 귀에 익은 노래 「에델바이스」. ‘Edelweiss, Edelweiss…Small and white, clean and bright…Blossom of snow…Bless my homeland forever(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아담하고 희며, 깨끗하고 밝게…눈 속의 꽃아…우리나라를 영원히 지켜다오)’.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삽입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알프스 지역의 노래 아닌가. 원래 천사였으나 인간의 모습으로 알프스 산꼭대기에 내려왔고, 아름다운 그녀를 만나러 등산 도중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다시 하늘로 가버렸다. 그 자리에 새하얀 꽃이 피었는데, 그것이 ‘고귀한 흰빛’이란 뜻의 ‘에델바이스’. 스위스를 상징하는 꽃이다. 알프스에 주로 자생하는 꽃으로, 꽃말은 ‘순수’. 스위스 사람들은 왜 1, 4, 7을 꼭 에델바이스 꽃잎처럼 써서 헷갈리게 하는지.

저녁 무렵, 루체른 역에 도착. 루체른 호수 근처의 민박집으로 가서 여장을 풀고 쉰다. 내 생애 처음, 스위스에서 자는 잠은 달다. 다음 날, 선착장으로 가서 유람선을 타고 루체른 호수를 둘러본 뒤, 깎아지른 바위산 필라투스를 등반열차를 타고 오른다. 필라투스! 한글『성서』에 ‘본디오 빌라도’ 등으로 나오는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를 말한다. 초기 로마 제국 시대 유대지방의 로마 총독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사람이다. 그의 망령이 각지를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이 산에 머물게 되었다는 전설에서 비롯한단다. 호수 연안 목초지의 목가적 풍경과는 달리, 사람을 거부하는 듯한 차가운 바위는 공포스럽다. 그 가파른 경사를 꾸역꾸역 30여분 오르는, 붉은 색의 등반철도는 케이블카 같기도한데, 이런 급경사에 길을 만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프레크뮌테크의 썰매기구 터보강. 타고 가면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최재목

산 정상 역에 도착. 표고 2,067m. 역 건물 상층에는 원형의 벨뷰 호텔(1960년 건축), 전망대, 필라투스 쿨룸 호텔(1890년 건축)이 있다. 여기에 호텔이라니! 경이롭다. 나는 표고 2,118m의 에젤봉까지 오른다. 길 중간 바위에 걸터앉아 간식을 먹는데, 겁 없이 달려드는 까마귀 떼는 극성이다. 손에 든 음식과 비닐봉지를 제 멋대로 쪼기까지 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루체른 호수, 눈 덮인 융프라우를 비롯한 주변의 산들, 모처럼 눈 호강을 한다.

지체할 수 없어, 케이블카로 반대쪽 크리엔스로 내려가 1번 트롤리 버스를 타고 루체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5분 정도를 내려오면 프레크뮌테크. 여기엔 세계에서 제일 긴 터보강(Toboggan)이라는 썰매 같은 놀이기구가 있다. 산 위에서 보면 지그재그로 그어놓은 선들이 모두 썰매장의 레일이었다! 동심이 살아나 딸아이를 따라 타보기로 한다. 꽃 숲에 묻혀, 홀로 썰매를 운전하며 내려가는 기분은 어릴 적 비닐 포대기로 눈 덮인 언덕을 씽씽 치닫던 그 쾌감이다. 너무 재미있어, 한 번 더 탄다.

카펠교 대들보에 그려진 루체른 수호성인 생애를 담은 112개 판화작품이다. 사진 최재목

다시 루체른으로. 지붕이 덮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 카펠교를 건너본다. 누구나 사진에 담아가고픈 루체른의 랜드 마크다. 다리의 중간쯤에는 팔각탑 바서투름이 있는데, 예전에 요새, 감옥, 보물창고 등으로 쓰였단다. 다리 지붕의 대들보에는 루체른 수호성인의 생애를 담은 112개의 판화작품이 붙어있다. 우리 사찰의 탱화나 사천왕문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잠시 자신을 수호하기 위한 다기능의 도구를 감춘 스위스제 ‘아미 나이프’(맥가이버 칼)의 의미를 곱씹는다. 「에델바이스」 노래 끝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와 다를 바 없듯, 적도 동지도 없는 영구중립국 스위스의 밑바닥엔 역시 ‘자기수호’의 정신인가.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