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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기억과 비판적 공식 기억의 잠재적 충돌지
개인 기억과 비판적 공식 기억의 잠재적 충돌지
  • 교수신문
  • 승인 2013.03.2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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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18_ 이화장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서울 종로구 이화동 1-2번지에 있는 梨花莊은 대한민국의 건립 과정을 증언하는 건물 중의 하나다. 이승만은 1945년 해방된 조국에 귀국했지만, 마땅한 거처를 구하지 못한 채 마포장과 돈암장을 전전하는 생활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지인 30여 명은 돈을 갹출해서 신식 한옥인 이화장을 구매해서 이승만에게 거처로 제공했다. 이승만은 1947년 11월에 입주해서 경무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약 8개월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 짧은 기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화장의 조각당에서 초대내각을 구성하기도 했다.

‘건국’과정 증언하는 역사적 장소
당시 많은 정치인이 이 집에 모여서 건국과 관련된 중요한 논의들을 했는데, 이 때문에 이화장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기억될 수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도 이곳에 가끔 들러 정원과 뒷산을 산책하곤 했다. 그에게 이 집은 개인 사저 이상의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현재 이화장은 ‘이승만 박사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방문자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기념관 안에는 그가 사용했던 많은 개인적인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 가운데는 이곳으로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쓴 漢詩와 이를 번역한 족자가 걸려있기도 하다.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7호로 지정된 이화장. 이곳의 대문이 어느 사람에게나 항상 개방돼야 한다는 여론이다.

이화장에 이사와서
“동대문 북쪽 낙산(駱山)앞에/이화동 옛골짝에 새로 집터 잡아오니/보신각 종소리는 잔비 속에 들려오고/종남산(終南山) 그림자는 구름가에 보인다네/아이는 눈을 쓸어 소나무밑 길트이고/아낙내 어름 깨어 바위사이 물긷는다/집안이 작다 한들 그어찌 마달손가/숲속과 계곡에는 풍연(風煙)이 가득하니”━1947년 겨울

이화장은 대지 약 5천500㎡, 건평 230㎡에 지어진 건물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왼편에는 ‘우남리승만박사상’이 우뚝 서있다. 두벌대 장대석 화강암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6칸의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의 ‘ㄷ’자형 본채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ㄱ’자형의 조각당이 있다. 이화장은 192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비교적 큰 신식 한옥 중의 하나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한옥이 일본 건축기술과 접목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동대문 북쪽 낙산(駱山)앞에/이화동 옛골짝에 새로 집터 잡아오니/보신각 종소리는 잔비 속에 들려오고/종남산(終南山) 그림자는 구름가에 보인다네/아이는 눈을 쓸어 소나무밑 길트이고/아낙내 어름 깨어 바위사이 물긷는다/집안이 작다 한들 그어찌 마달손가/숲속과 계곡에는 풍연(風煙)이 가득하니”━1947년 겨울 이화장은 대지 약 5천500㎡, 건평 230㎡에 지어진 건물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왼편에는 ‘우남리승만박사상’이 우뚝 서있다. 두벌대 장대석 화강암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6칸의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의 ‘ㄷ’자형 본채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ㄱ’자형의 조각당이 있다. 이화장은 192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비교적 큰 신식 한옥 중의 하나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한옥이 일본 건축기술과 접목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경쟁자였던 김구의 경교장에 비하면 1/4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크기다. 또한, 경교장이 시내의 중심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면, 이화장은 풍연이 가득한 숲과 계곡에 있다.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전개와 이승만이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정치적 파워와 능력 그리고 야망은 서로 달랐는데, 그가 당시 중앙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데서 느끼는 소외감과 답답함이 그의 한시에서 잘 묻어나고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신의 감정과 야욕을 제대로 조절하고 이를 공적으로 승화하지 못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냈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이승만은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다시 이화장으로 돌아오지만, 약 한 달 후에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면서 더 이상 살아서는 이 집을 보지 못하게 된다. 하와이에서 운구된 그의 시신은 나흘 동안 이화장에 안치됐다가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화장은 이후 1970년부터 1992년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의 거처로 사용됐다. 전두환 정권은 이화장을 1982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했으며, 이명박 정부는 2009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7호로 승격시켰다.

1988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면서 많은 사람이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는데, 여사의 검소한 생활과 방문객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모습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향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현재 대학로에서 낙산공원으로 가는 길목은 추억을 일깨우는 관광명소가 됐다. 그 길목 중간에 이화장이 있다. 많은 관광객이 이 길을 지나가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이제는 희귀한 이 한옥을 담장 너머로 바라보는데 만족하고 있다. 이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사전예약을 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사전에 알기도 어렵고, 절차도 번거롭다. 평소에 이화장의 대문은 굳게 닫혀있다. 방문을 원한다면 며칠 전에 담당자에게 전화 예약을 해야지만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이화장이 현 정부에 의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됐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장소는 교묘한 방식으로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비판적 공식기억에 의하면, 그는 극단적인 친미, 반공정책으로 남북통일을 가로막고 남북갈등을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에 대한 무한한 사적 탐욕 때문에 헌법질서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또한 친일잔재 청산에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들과 결탁해서 부패의 고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이승만은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한 실패한 지도자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개인적 기억들이 이런 평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찍이 서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국제관계와 민주주의에 대해 남다른 지식과 혜안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지식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화를 막아내고, 자유민주국가로 대한민국을 건립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화장의 대문이 항상 개방되려면
비판적 공식 기억이 억압받고, 國父로서의 우호적인 개인적 기억이 연상되고, 또는 제시되고 있는 장소가 바로 이승만기념관인 이화장이다. 기념관 안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다양한 개인적 유물들이 그의 검소하고 영웅적인 업적을 대변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볼품없이 전시되고 있지만, 이런 시각과 평가에 균형추 또는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비판적 공식 기억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현재 한국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들과 평가들이 충돌하면서 적지 않은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개인 기억들과 비판적 공식 기억과의 조정과 타협을 통해 극복해야 하지만, 아직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화장은 이 틈새를 좁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볼품없이 전시된 개인적 유물들은 전시실에 갇혀있고, 기념관의 대문은 굳게 닫혀있을 뿐이다. 불행했던 역사를 용감하게 직시하고, 인권과 자유를 바탕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이화장의 대문은 어느 사람에게나 항상 개방될 수 있을 것이다.

 


조관연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문화인류학
독일 쾰른대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Ph. D.). 문화변동, 그리고 미디어와 문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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