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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정치 그 사이에 ‘생태학’이 있다
과학과 정치 그 사이에 ‘생태학’이 있다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3.03.25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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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❻ 생태학의 역사

생태학의 근간은 과학이고, 실현은 정치다.『 생태학의 역사』(안나 브람웰 지음, 김지영 옮김, 살림刊, 2013)는 부제가 말하듯 에콜로지(생태학)의 기원과 전개를 면밀히 살핀다. 특히, 생물학과 물리학은 생태학의 결정적 뿌리라고 한다.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해석이 좀 더 가능해지면서 생태 운동은 등장한다.

책은 생태주의라는 거대 담론을 다룬다. 그런데 역사학과 교수의 장점을 살려 20세기 시대를 종횡무진 달린다. 그 속에 학술적이면서도 동시에 에세이 형식의 저자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종교와 철학, 과학과 정치, 진보와 보수, 자유와 공동체, 경제와 윤리 등은 관점을 이끄는 축들이다.

“생태주의자들은 자연이 영원한 현실을 구현하고, 과학적 방법이 진실을 밝히는 수단이라고 믿는다.” 저자는 생태주의자들이 객관성을 거부하진 않는다고 봤다. 특히, 정치를“무질서한 욕구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생태주의자들 역시 정치적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생태주의자들은 평범한 정치적 담론의 영역에 저항하면서 정치적 범위를 넓혀간다.”그래서 과학과 정치, 그 사이에 ‘생태학’이 있다.

자연과 생태 그리고 자본주의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소수의 가치에 중점을 두면서도, 전체적 계획 혹은 강압을 통해 대규모 계획을 기획한다. 이러한 경향은 마르크스의 영향에서 비롯됐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생태주의자일가? 브람웰은 아니라고 일갈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철저한 인간 중심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환경, 자연과 생태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와 엮이며 착취당할 뿐이다. 변증법적 역사 과정은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둔다. 하지만 생태학은 그렇지 않다.

헤켈은 1866년『생물체의 일반 형태론』에서 생태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생태주의는‘외콜로기(Oekologie)’에서 유래했다. 이 뜻은“유기체와 그들을 둘러싼 환경 사이의 그물망을 의미”한다. 자원의 활용과 보존은 도덕적이며, 동시에 경제적이다. 그래서 생태주의 역시 도덕과 경제에 연관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생태학 혹은 생태주의의 특징을 △자연 중심적 전체 세계관 △과학적 지식과 자연 질서에 대한 경외심으로 규정한다.

한편, 자원은 유한하다. 그래서 생태주의는 기술 혹은 효율적 생산에 매달리기도 한다. “에너지생태주의자들은 토지 부족과 인류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량생산 실패의 두려움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했다.”라우프비르트샤프트(Raubwirtshaft, 약탈경제 혹은 황폐화)는 이러한 두려움을 부추긴다. 토양침식과 광물자원 소실 등에 의한 에너지 손실은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경우, 에너지 가치 이론을 연구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놓쳤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추종자이자 과학적 유토피아주의자인 조셉 포퍼 린케우스, 발로드 등은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향후, 오염 극복, 자급자족, 무정부주의 유산과 개인의 가치를 믿는 생태 지향적 코뮌 운동이 움튼다.

생태주의는 문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소규모 농장주에 대한 작품을 쓴 크누트 함순과 헨리 윌리엄슨이 대표적이다. 반자본주의, 정당 정치와 정통적 정치 범주를 거부하는 건 두 생태주의 문학의 공통점이다. 자연은 늘 중심에 있다. 그렇다고 목가적 생활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농민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생존의 측면에서 치열하다.

자연주의는 자연의 항의자이다

저자는 특히 독일의 생태주의에 주목한다. 국가사회주의의 완성을 위해 생태주의가 기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문화비평과 철학적 인간학은 그 핵심이다. “자연주의는 자연의 항의자이다.” 변화와 성장, 인간 중심과 낙관주의는 이들의 성향이었다. 한편, 평화적 생태주의와 독일 민족주의의 관계는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反기독교 유대문명, 모권사회 이론 등이다.

모든 대안 받아들인 20세기 생태주의

과학은 생태주의 발전에서 이중성을 띠었다. 때로는 생태주의의 기반으로, 때론 생태주의의 배신으로. 그만큼 다양한 생태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언제나 과학기술의 극단적 모습은 지양한다. 책속의 표현대로 “작은 컴퓨터는 작은 우물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 토양협회는 정통과학을 비난하고, 다국적 기업의 일방적 과학기술을 반대했다.

20세기 생태주의 상자는 모든 대안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 초기파시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자유주의 자연과학자, 몽상가 등. 이들이 제일 처음으로 인식하는 이샹향은 같았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그 다음의 조류는 물론 달라질 수 있다. 원시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에게 적합한 생태주의는 어떠한 내용을 담은 상자이어야 할까?

생태주의의 역사를 관통하는 과학의 색깔은 ‘회색’이었다. 새로운 생태주의를 위해 어떤 색깔을 품어야 할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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