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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친일 청산을 가로막는 것들
신문로 세평-친일 청산을 가로막는 것들
  • 임헌영 중앙대
  • 승인 2002.08.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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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31 14:53:11
실로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버젓하게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 있는 나라에서 명백한 반민족 행위자를 연구, 분석, 비판, 거론하는 일이 마치 범죄처럼 사갈시하는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 악독한 관료들이 독립투사를 탄압하듯이 일부에서는 오늘의 친일파 청산을 못 마땅해하며 온갖 낮 도깨비같은 허황한 논리로 생트집 잡기에 혈안이다.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 지경일까. 거짓말이 참말을 이길 기세다.

친일 청산에 가장 앞장서야 할, 그래서 지난 2월에 앞장섰던 광복회가 회장이 바뀌자 그 포기를 공언하고 있는데, 그럼 제발 말 좀 해 보자, 광복회는 필요 없는 단체로 해산해야 할 처지인가, 아닌가.

차근차근 따져보자. 남의 나라 침략자에 빌붙어 제 나라 주권을 짓밟고 제 민족을 오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반국가, 반민족, 반역사, 반평화, 반인권, 반인륜적 행위가 과연 떳떳하고 정당하며 자랑스럽고 포상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세계 역사에서 이런 행위자를 묵인 혹은 용서하는 나라가 지구 위에 얼마나 있을까.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만약 반민족 행위가 나빴고 독립운동이 옳았다면 당연히 이에 따른 엄정한 평가가 따라야할 터인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연유가 무엇일까. 어떤 가치관과 윤리의식이길래 친일파 청산을 비판할 수 있을까.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왜 새삼 과거를 들추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미루면 언제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더구나 소수이면서도 목소리는 더 요란한 친일 옹호론을 보노라면 정말 친일파 청산은 반드시, 철저히, 빨리 수행해야 될 과제로 다가온다. 반대여론이 높을수록 청산의 강도도 높여야 진정한 심판이 이뤄질 것이다.

극히 초보적인 것부터 다짐해 보자. 프랑스나 독일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들이 전후 청산을 서둘러 철저히 시행한 것이 잘못이고, 이를 밍그적거리며 깔아뭉갠 이승만 정권이 잘 한 것일까.

식민통치의 잔학성이라는 상황론을 거론하며 궁극적으로는 전국민이 다 친일파라는 기발한 저인망식 논리로 식민잔재 청산의 뒷퉁수를 치기도 한다. 이런 한심한 논리라니. 그래, 흰죽도 못 먹던 사람과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사람이 똑같은 죄인이란 말인가. 아니, 가령 여기 한 어머니의 수술비를 위해 강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있다 치자.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사회의 잘못이다. 당신들 모두가 죄인인데 왜 나를 잡아 가두나?” 이런 논리라면 세상에 죄인은 하나도 없다.

분명히 밝히자. 친일파는 극소수다. 극소수를 위하여 왜 전국민이 함께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무고한 국민을 담보로 친일파들이 자신의 죄과를 상쇄하려는 친일파 청산 물타기식 논리에 함몰돼서는 안된다.

정치적, 도덕적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으나, 친일파 청산론은 그야말로 정당·정파적 차원이 아닌 민족사적 관점에 서있으며, 도덕적 잣대만이 아니라 인류 공존 공영의 평화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하고 있다. 또 도덕적 잣대가 왜 중요하지 않는가. 인류 역사란 정의와 진리를 향한 진보이거늘 이를 무시하고 물질적 풍요만을 잣대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재능론과 업적론으로 친일파 청산의 입을 막으려는 논리도 있다. 재능만 있으면 무소불위인가. 그리고 업적이 있다면 추상적인 변죽만 울리지 말고 민족을 위해 한 일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게 좋을 듯 하다. 물론 어떤 업적도 반민족의 죄과를 상쇄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업적론이 요란하니 궁금해진다.

청산 제동 논리 중 가장 교묘한 게 식민지 근대화론인데, 일제 침략으로 우리가 더 살기 좋아졌다는 주장이다. 자칫하면 제발 다시 침략해 달라는 주문 같아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야만적인 정복전과 포악한 독재가 이래서 다 합리화 될 것인가. 강도질하여 보석을 선물한 남자에게 찬사를 보내는 게 옳은가.

끝으로 한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지금 일부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악 역사서술은 정당한가, 잘못인가. 정당하다고 답하는 상대라면 더 할 말이 없다. 무얼 달리 말하랴. 그러나 잘못이라면 왜 일본은 비판하면서 우리의 과오는 묵인하려는가 묻고 싶다. 답답한 노릇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부소장·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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