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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死의 기로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生死의 기로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 승인 2013.03.18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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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33)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사각의 콘크리트 조형물.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유대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무덤ㆍ비석ㆍ관의 상징이다. 사진=최재목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닿을 즈음, 즐비한 사각의 콘크리트 조형물이 눈에 든다. 2천711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유대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무덤·비석·관의 상징이다.

아, 히틀러! 그는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실무책임자 아이히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는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악을 저질렀다. 한나 아렌트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조명한다. 평범한 한 인간의 ‘무사유’가 얼마나 끔찍한 ‘惡’을 만들 수 있는가를.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실행하는 그런 일상의 평범함 속에 숨어있다. 無腦의 근면·성실은 두렵다. 명령에 따라 각종 포탄·화학무기·독약·불량식품 제조에 묵묵 몰입하는 사람들. 타인의 정신적인 불행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각종 전문가들. 데카르트는 그들을 ‘허위의 자격’(=사기 전문가)라 생각했다.

히틀러는 미술을 배우러 오스트리아의 분리파 화가 구스타프 크림트를 적대해 등진 롤러를 찾아갔으나 롤러는 그를 다른 화가에게 보냈다는데, 만일 그가 정치를 혐오했던 크림트를 찾아 미술을 계속했더라면 역사의 엄청난 비극은 멈췄을까? 상상일 뿐, 홀로코스트는 이미 엎질러버린 물. 역사 속에서 ‘만일…이라면’은 통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자 들은 이 死者들에 대한 책임감을 쉽게 망각하니, 인간의 오만은 반복된다.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갇혔을 때, 목동의 채찍에 쫓기는 양떼 같이, 본능적으로 대열 속 깊숙이 몸을 숨기곤 했다. 그가 수용소에서 자신의 삶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런 처절한 삶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의미 의지(will to meaning)’임을 눈치 챘다. 니체가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삶에는 무언가의 ‘위하여!’가 있어야 함을. 그는 삶의 고갱이(=의미)를 찾아 살려나간다는 로고테라피(의미요법)를 주창했다. 그래서 그는 도구적 인간(Homo faber)보다 고뇌하는 인간(Homo patiens)의 가치가 앞선다고 본다.

고난 속에서 희망이란 삶의 고갱이를 바라보는 힘! 어릴 적 나의 할머니는 아셨다. 긴 콩밭 고랑의 풀을 매면서 흥얼대던 ‘아리랑’,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 처럼, 하늘의 잔별들이 모두 번뇌였고, 또 그런 愁心의 고랑을 유유히 걸어 나가는 힘이 꽃이자 희망이었음을, 아셨다. 요즘 가사엔 ‘수심’이 ‘희망’으로 바뀌긴 했으나, 나는 모르겠다. 우리들 가슴 속에 수심보다 희망이 많은 지는.

딸아이는 사각의 콘크리트 조형물이 뭔지도 모르고 밟고 뛰어다니다 관리인에게 쫓겨 내려오고 만다. 천진난만은 생사와 역사를 훌쩍 뛰어 넘는데, 그래, 살아있는 우리들 몸이 나를 기념하는 비석이요 관이자 무덤 아닌가. 눈이 내리면 눈 속으로, 해가 지면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저 분묘들. 몸은 삶의 밑 빠진 독=형식. 그곳에서 삶은 춤추다가 홀연히 빠져 나간다. 그 ‘있음’의 흔적을 꿀꺽 삼키는 블랙홀인 ‘죽음’. 그것을 하이데거는 ‘無의 棺’이라 했다.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여기 그가 잠들다/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송찬호,「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처럼, 죽음은 삶을 지우는 지우개다. 지워진 삶의 부스러기를 땅바닥에, 허공에다 툭툭 털고 나면 남는 건 無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빨아들이는 사각의 관, 대지 위로 하늘은 그저 푸르기만 한데,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가? 빅터 프랭클 일행이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 그런 처참한 상황에서 도취되던, 호송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 석양빛, 수용소에서 일할 때, 바바리아 숲의 키 큰 나무 사이로 비치던 햇빛,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도 바라보던 서쪽의 빛나는 구름,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형형색색의 구름으로 살아 숨 쉬던 하늘.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이시형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81~82쪽) 생사의 기로에서도,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아름다울까?

베를린을 떠나며, 노을이 지는 독일의 봄 벌판을 바라본다. 붉은 노을, 저 핏빛처럼, 삶은 어느 시에서 말하듯, 끊임없이 피 흘리는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선한 자든 악한 자든, 모두 생명은 피 흘리는 꽃인가? ‘…문득 유태인들을 무수히 학살한/어느 독일 여자 수용소장이/종전이 된 후 사형을 며칠 앞두고/자신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생리를 보며/생의 엄연함을 몸서리치게 느꼈다는 수기가 떠올랐다/생은 아름다울지라도/끊임없이 피 흘리는 꽃일 거라고 생각했다.’(윤재철,「생은 아름다울지라도」)처럼. 그늘 많고, 악을 품은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삶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네 형들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고 말할 수밖에. 그러면, 인간의 그늘과 근본악 속에도 神은 늘 자리해야 한다. ‘하느님, 제가 죽어버리면 당신은 뭘 하시겠습니까? 나 없이 당신은 무슨 의미를 갖겠습니까?’라는 릴케의 말대로!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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