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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시대와 텔레비전
‘방콕’ 시대와 텔레비전
  • 정준영 한국방송통신대ㆍ문화교양학과
  • 승인 2013.03.18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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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 정준영 한국방송통신대ㆍ문화교양학과

 

정준영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문화교양학과
경기가 나빠지면 사람들의 생활은 어떻게 바뀌는가. 먼저 갖가지 부문에서의 소비지출이 줄어들 것이다. 나아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저하되면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질지 모른다. 최근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런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요 근래 가장 화제작이었던 「내 딸 서영이」의 사례를 보자. 시청률 조사기관 TNmS의 조사에 따르면 마지막 4회 연속 40퍼센트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특히 최종회에는 46.7퍼센트의 시청률로 거의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오를 만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무엇보다도 동시간대 다른 채널에 마땅한 경쟁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점이 꼽힌다. 동시에 별로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갈등 설정, 캐릭터가 살아 있는 조연들, 시청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결말 등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특히 기존에 잘 다뤄지지 않았던 부녀 사이의 갈등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는 점은 이 드라마의 독특성이자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과 관련해 주목하는 점은 「내 딸 서영이」가 주말 드라마였다는 점이다. 일일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의 구조에 월화 드라마와 수목 드라마가 추가된 이후 「태조 왕건」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들은 대부분 주중 드라마, 그 중에서도 월화 드라마였다. 최고 시청률에서 역대 4위이자 평균시청율 53퍼센트로 2000년 이후 드라마 중 유일하게 평균 시청률 50퍼센트를 넘긴 MBC의 「허준」, 35주 동안이나 시청률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주몽」, 최고 시청률 55.5퍼센트로 역시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던 「대장금」등이 모두 월화 드라마였으며, 최고 시청률 42.3퍼센트의 「해를 품은 달」과 SBS의 「뿌리 깊은 나무」등은 수목드라마였던 것이다.

'주말 드라마'의 시청률 법칙

2000년대 이후 주말 드라마의 상대적 퇴조와 주중 드라마, 그 중 특히 월화 드라마의 높은 인기는 개별 작품의 질과 아울러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 습관의 변화와 밀접히 연결돼 있다. 특히 어떤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려면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던 시청자들 그 중에서도 남성 시청자들의 시청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과거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주말 여가활동은 휴식과 TV 시청 등 주로 수동적 여가활동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주말 드라마가 가장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가 됐다. 역대 시청률 1, 2위를 기록하고 있는 KBS의 1996~1997년 작 「첫사랑」과 MBC의 1991~1992년 작 「사랑이 뭐길래」가 모두 주말 드라마였다. 반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고 주말 여가활동이 좀 더 활동적인 것으로 바뀌면서, 또 인터넷이나 IPTV 등을 통해 굳이 본방송 시청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주말 저녁 시간대에 TV 앞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는 그만큼 줄어들게 됐다. 대신 가족 모두가 함께 TV를 보는 시간은 한 주의 시작이어서 사교활동을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월요일과 화요일이 됐다.

여가활동의 위축과 판타지 이후

그런데 「내 딸 서영이」가 주말 저녁 시간대에 40퍼센트 중반대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게다가 일요일에 비해 조금 낮긴 하지만 토요일 저녁에도 최고 43.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점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주말이 ‘방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2008년 이후 명확한 끝이 보이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여가 활동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것이다. 그것은 근자에 계속 보도되고 있는 소비지출의 둔화 소식과도 부합한다.

우려스러운 점은 그런 상황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근자의 드라마를 보면 「광고 천재 이태백」이나 「최고다 이순신」처럼 만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제목과 더불어 「마의」와 「신의」등 마치 무협지를 연상시키는 제목의 드라마가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무협과 「해리 포터」시리즈, 「반지의 제왕」시리즈 등의 인기에 힘입어 판타지가 각광을 받았던 IMF 환란 시기 이후 다시 판타지의 부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내가 여기서 판타지 풍의 인기를 현실도피 욕구의 반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판타지가 일반적으로 복잡한 현실의 구조를 비교적 단순화된 틀로 환원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판타지적 경향은 복잡한 사고를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고전적 설명에서처럼 주말의 여가활동이 좀 더 휴식지향적인 쪽으로 바뀐 것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판타지 이후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부디 수동적인 ‘방콕화’가 적극적으로 희생양을 찾는 지경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 경제위기가 마무리되기를 바랄 뿐이다.

정준영 한국방송통신대ㆍ문화교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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