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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理’로 돌아간 결론 어떻게 봐야 할까
‘義理’로 돌아간 결론 어떻게 봐야 할까
  • 교수신문
  • 승인 2013.03.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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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_ 「신세계」, 살아남기 위해 독해지기

▲ 의리와 정의에 관한 내밀한 의식을 엿보게한 영화 「신세계」의 세 인물. 이들 사이에 어떤 경계가 있을까? 사진제공 NEW
남성 세계의 의리와 배신이라는 테마는 영화의 역사에서 사랑받아 온 장르의 한 축이다. 아드레날린이 넘쳐나고, 총격전으로 피칠갑되는 이 세계는 느와르, 갱스터 등의 이름으로 당대와 호흡하면서 「대부」와 「영웅본색」, 「무간도」 시리즈 등의 이름으로 관객의 마음을 이끌었다. 박훈정 감독은 이를 「신세계」로 명명한다. 냉정히 말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느낌이기보다는 친숙한 세계를 한국적으로 번역해 낸 결과물에 가깝다고 느껴지지만 그동안 다양한 인기를 누려온 ‘조폭 코미디’ 중심의 번역물에서 좀 더 서구적인 틀에 가까운 버전을 경험하게 만든다.

경찰인 강형식 과장(최민식 분)의 대사들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라는 돈 꼴리오네의 대사를 떠올리게 하며, 정체성을 두고 방황하는 「무간도」의 줄거리는 새로운 「신세계」에 도전하는 한국판 누아르 영화의 뼈와 살을 이루고 있다. 이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며, 남성들의 세계다. 여러 조직들을 규합해 조폭에서 기업형 조직으로 바뀐 ‘골드문’은 그 동안 통치하던 보스가 사망한 뒤 새로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음모가 판치기 시작한다. 이 약육강식의 게임 속에 경찰이 개입한다. 조폭들의 세계는 이제 악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 자리에 선 경찰의 모습은 조폭보다 비열하고 치졸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짝패처럼 닮아 있는 동전의 이면이다.

「신세계」는 경찰이든 조직이든 서로의 조직원을 사지로 던지는 잔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상황은 공황 상태에 이른 국가나 사회의 단면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위서열에 있는 사람들을 내던진다.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경찰의 말이나 죽어나가는 조직원들을 보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잔혹성은 이 영화를 단순히 즐길 수만은 없게 만드는 당대 현실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조폭집단에 잠입한 이자성(이정재 분)에게 다가오는 위기 상황은 극한의 감정으로 묘사가 된다. 골드문 2인자인 정청(황정민 분)은 경찰 프락치를 파악해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청은 이자성이 ‘경찰’에 소속된 인물이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거하는 대신 특별한 기회를 준다.

피비린내 나는 서열간 전쟁 속에서 가장 예리한 인물 중 하나인 정청이 배신자이며 프락치인 이자성을 감싸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이 다소 뻔해 보이는 「신세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대목이며, 영화 전체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대목을 이룬다. 조직 내의 프락치를 다룬 유위강 감독의 「무간도」는 경찰과 조직 사이에 서로 ‘프락치’를 심어 넣었다는 설정을 통해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사건들을 겪게 되고,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 갈등을 벌이게 된다.

프락치라는 설정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신세계」는 경찰에 소속돼 있다가 갱의 보스가 돼야만 하는 한 남자에게 중심을 맞추고 있다. 병원에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을 드러낸 정청이 이자성에게 던진 마지막 충고는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해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독해져야 한다는 결론은 술자리에서 흔히 벌어지는 세속적인 충고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실 이 영화가 펼쳐보이는 게임의 결론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자성이 프락치의 삶을 선택한 것은 경찰 내에서 높은 보직을 보장받고 행복한 삶을 살아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강형식 과장은 갱들보다 더 지독한 협박을 하면서 애초의 약속을 파기해 버리는가 하면, 이자성의 배신을 두려워하면서 그의 아내조차도 남편을 감시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이자성의 삶은 모든 것이 ‘가짜’다. 아내도, 조직의 관계도, 경찰의 보장도 모두 가짜로 이뤄진 허상이었다. 그 가운데 ‘진짜’로 자리잡은 것은 바로 자신이 따르고 있었던 ‘정청’이라는 존재다. 이자성을 향해 ‘브라더’라고 부르는 그는 의리와 신뢰로 뭉쳐진 남성들의 신화를 강조하고 보장하는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모든 것이 정리가 된 후 6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정청과 이자성이 함께 했던 여수 장면이 등장한다. 이 두 남자는 어렵게 서로를 도와가면서 동고동락한 사이였고, 한국 사회에서 억압받아왔던 ‘화교’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소수자의 결의와 남성 신화가 겹쳐지면서, 그것이 영원히 보장받을만한 안락한 사회라는 결론에 이른다. 의리로 돌아가는 이 영화의 결론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단순한 정치적 해석은 한국 사회의 현재 모습과 겹쳐읽는 것이다. 대선의 결과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과거의 의리를 선택했다.

정의로운 삶이 개인의 현재를 보장해 주지도 못하고, 누구나 요청받는 것은 생존을 위해 냉혹하라는 충고다. 사실 영화 초반부는 너무나 익숙한 관습들이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탓에 이 영화에 대한 열광을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의리와 생존을 선택하는 이자성의 모습은 언뜻언뜻 당대의 자화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지금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적 이미지는 ‘냉정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절차나 가치는 무시된다. 경찰이었던 이자성이 생존을 위해 조직을 배신하고 동료 경찰을 처단한 뒤, 조폭 보스의 자리에 오르는 장면은, 박수를 칠 수는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우리가 보아오던 현실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꽤나 표피적으로 보이는 이 누아르는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집단무의식을 예리하게 건드는 지점을 만들어 냈다. 나는 이 결과가 한 편으로는 무섭고, 한 편으로는 씁쓸하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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