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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놓여있어야 할 자리
책들이 놓여있어야 할 자리
  • 교수신문
  • 승인 2013.03.1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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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아이리스」를 보는데 내 눈길은 다소 엉뚱한 데로 향한다.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를 어머니가 사는 고향집으로 데려갔을 때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앨범을 넘겨보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나는 그들의 뒤편에 놓인 책장을 안타까운 눈길로 더듬는다. 실망스럽게도 책장은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데 심지어 손 한 번 대보지 않은 것 같은 행정법개론 다섯 권이 무감각하게 꽂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인공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드라마 이야기를 하자니 오래 전에 인기리에 방영됐던 「보고 또 보고」라는 드라마가 떠오른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확실하지는 않다. 그 드라마에는 자매가 나왔는데 언니 금주는 작가 지망생 대학원생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녀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보고 반해 버렸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였던가. 어떤 책인지는 상관없이 주인공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곧 실망감이 찾아들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그녀는, 대학원생이고 나중에 교수로 임용되는 사람이며 부유한 집으로 시집을 가는데도, 화장대에서 궁색하게 공부를 하는 척 했고 책들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나중에 그녀가 친정의 자기 방을 찾아갔을 때 그 방에는 텅 빈 책상과 책장이 그녀의 영혼처럼 버려져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듣기에 따라선 퍽 민망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결혼하면서 잃어버리는 게 뭘까요?” 당연히 이 물음의 답은 순결이 아니라 책상이다. 소설가 이순원은 어느 글에선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어야 할 선물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물푸레나무 책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진정 사랑한다면 아내에게 책상을 선물해라. 이것이야말로 훨씬 더 옛날에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요구했던 것들에 대해 조금은 덜 혁명적이고 더 공감적인 방식으로 응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혼수에 아내의 책상이 포함되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처녀 때 그녀가 쓰던 낡은 책상은 친정에 남겨지거나 버려진다. 그녀가 다시 집안에 책상을 들이는 것은 아이를 갖게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그녀는 전집류의 책들을, 질 떨어지는 잡지들을 사들인 뒤에 아이들에게 책읽기를 강권한다. 아이들은 고삐를 잡혀 강으로 간 당나귀가 목이 마른데도 불구하고 푸른 강물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결사적으로 책들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아무래도 책은 그들에게 그렇게도 낯설어서 무서운 물건인 것이다. 감히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의 책장을 내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다고. 대학시절에 나는 만점에 가까운 학점으로 수석장학금을 독차지하던 복학생 선배의 하숙방에 단지 세 권의 책이, 그러니까 영한사전과 성경책과 포크송대백과사전이 이른바 ‘족보’라고 불렸던 노트 복사물들과 함께 놓여있는 걸 보고, 마음 속 깊이 그를 경멸했다. ‘당신은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효율적이니까. 그렇지만 당신은 죽을 때까지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진정 무엇을 원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가 지닌 책장을 통해 사람들을 평가하곤 한다. 뉴스에 나오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떠들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의 서재를 쓰윽 훑어보고 그의 사람됨을 판단한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크고 아름다운 서재에 쓰레기들만이 가득한 것을 발견한다. 그 사람의 세계가 은은히 묻어나는 책들을 지닌 사람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이것 또한 병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견물생심이라 했다. 좋은 게 있으면 자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하정우 같은 멋진 배우가 그저 먹기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어느 날엔가는 좋은 책 한 권 읽으며 저무는 오후를 보내는 장면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나 드라마에 누군가의 서재를 보여준다면, 그가 지녀야 마땅할 도서목록을 조사해서 적당한 책들로 서재를 꾸며 놓기를 나는 원한다. 책 따위야 그냥 아무렇게나 장식이나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천박한 사고들이 사라지기를.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감탄할 멋진 장소를 찾아내는 일에만 정신을 팔 게 아니라 좋은 책들을 거기에 가져다 놓아서, 거기에 우연히 꽂혀있었던 그 책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한 순간에 바뀌어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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