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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를 탄생시킨 중세의 기원들
근대 국가를 탄생시킨 중세의 기원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3.11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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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페르디난트 자입트 지음|차용구 옮김|현실문화|784쪽|32,000원

 

▲ 14세기의 필사화로 도시에 거주하던 다양한 신분 계층을 묘사했다. 당대의 의복과 다양한 작업도구를 살펴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인력으로 작동하는 기중기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1927년 체코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자입트(Ferdinand Seibt, 1927~2003)는 1969년부터 보훔대에서 교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스승 카를 보슬은 구조주의 역사학을 표방했던 독일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중세사가였다. 자입트가 쓴 책에는 『카를 4세-유럽의 황제』, 『유럽의 탄생』 등이 있다. ‘근대 유럽을 만든 중세의 모든 순간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사실 2000년에 번역된 바 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독일에서도 절판되고 말았다. 2008년 바젤만 출판사가 독일에서 이 책을 재출간했고, 이를 저본으로 새로운 번역서로 나온 게 바로 이번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이다.

번역은 독일 파사우대에서 서양중세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차용구 중앙대 교수가 맡았다. 구조주의 역사학 계열에 서 있지만 자입트는 이 틀 안에 머무르길 거부한다. 그는 구조주의 역사학과 미시사적 역사학의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구조라는 정형화된 장기 지속적 역사의 층위 속에 갇혀버린 개개 인물들을 발굴해냈다.

파리 대학가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전통적 신학 해석과 진보적 스콜라 철학을 논했던 젊은 논객들, 중세 필사화 속에 담겨 있던 장인들과 석공들의 작업 과정, 중세의 건축물과 예술 작품 뒤에 숨겨져 있던 개인들 등을 상세하게 재구성함으로써 당대의 생활상과 사고 체계를 새롭게 밝혀낸다. 책갈피마다 중세의 희귀한 필사본, 회화, 조각, 건축물들을 다룬 풍성한 시각 자료들을 수록하고, 꼼꼼한 설명을 곁들인 덕분에 책을 펼치는 순간,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근대 유럽 국가의 등장까지 연속과 변혁의 중세 1천년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저자의 시선은 민중문화를 만화경처럼 훑고 있다.

황제와 교황, 세속 귀족, 수도사, 시민, 농민, 여자와 아이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지만, 유대인 학살, 이단, 마녀, 고문실, 페스트와 같은 비참했던 중세의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입트가 파악한 중세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자 근본적인 속성은 권력을 놓고 황제와 교황 사이에서 벌어진 대립, 즉 ‘서임권 투쟁’(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까지, 가톨릭의 주교·수도원장 등의 성직 敍任權을 둘러싸고 로마 교황과 유럽 각국의 군주 사이에 벌어졌던 싸움)으로 압축되는 정치 생활의 영역이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됐던 중세 역사서들이 아날학파로 대표되는 학문적 계보를 따름으로써 사회사와 구조를 중시함으로써 정치적 사건의 이면에 있는 정치적 요인을 등한시했다는 한계를 보인 것과 대조되는 측면이다. 또 하나 이 책의 특징은, 주로 영국·프랑스와 같은 서유럽 국가의 시각에서 중세시기를 서술한 기존의 중세 역사서들과 달리, 로마 제국 이후 유럽을 통합하고 유럽을 장악한 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조를 중심으로 중세 역사를 설명한 점이다. 기존의 스페인-프랑스-네덜란드-영국으로 이어지는 서유럽·대서양 중심의 역사서술을 보완하는 지중해-발칸 반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발트해로 연결되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다. 『중세의 가을』로 잘 알려진, 또 다른 걸출한 중세 연구자인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문화와 심성에 주목해 중세를 조명한 것과 달리 자입트는 사회구조에 초점을 맞춰 중세를 바라본다.

이러한 시각은 유럽중심적 시각을 고수하고 있는 여타의 다른 역사학자들의 시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차 교수는 “자입트가 중세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른 서양학자들의 시각과 같은데, 이 점이 특징이면서 한계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한다.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전성기를 지나 노쇠해지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단계인 14, 15세기를 ‘가을’이라고 규정했다. 전성기를 지나 쇠락해가는 시대라는 의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가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서술 시각은 ‘순환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반면 세계를 변화시키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쳤던 정치적 연결 고리들을 통찰해왔던 자입트는 발전사관쪽에 서 있다. 차 교수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의 독특한 역사관이다. 중세는 더 이상 침체됐거나 고대와 근대 사이에 위치한 신비하고 낭만적인 세계가 아니다.

 

근대와 중세 사회의 유사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자입트의 접근은,

중세시기에 이미 ‘의회’와 같은 근대의 정치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나침반과 화약, 인쇄술 등 중세의 다양한 발명품이

서구 근대화의 토대가 됐다는 서술에서 쉽게 확인된다.

 

중세는 끊임없는 변화와 변혁의 시대였다. 그래서 저자는 이 시대에 생동력 있는 모습을 새롭게 부여했다”라고 설명한다. 오늘의 우리가 중세와 연속돼 있다는 그의 주장은 미국의 중세학자 조지프 R. 스트레이어의 ‘근대국가의 중세적 기원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근대국가의 특징과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세적 기원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사회와 중세 사회의 유사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자입트의 접근은, 중세시기에 이미 ‘의회’와 같은 근대의 정치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나침반과 화약, 인쇄술 등 중세의 다양한 발명품이 서구 근대화의 토대가 됐다는 서술에서 쉽게 확인된다.

예컨대 그는 중세의 과학을 두고 ‘근대 과학의 선구자’였다고 단언하거나, 심지어 중세 말기의 상상력이 근대의 상상력을 능가하며, 중세 사상가들의 생각이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대목에서 서구의 근대가 이미 12세기에 시작됐다고 주장한 스트레이어의 목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결론? 저자는 “올바른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해왔고, 삶을 계획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가치 있다고 생각한 인생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중세-근대의 단절이나 괴리가 아니라 ‘연속성’의 발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교황과 맞서 싸워왔던 ‘황제라는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비록 황제의 지배권이 확고하지는 않았지만, 제국이 존속하는 1천년 동안 제국은 대내외적으로 유럽의 운명을 1천년 동안 결정해왔다. 제국은 중세의 위대한 정치이념인 ‘황제라는 존재’를 통해서 마치 수수께끼처럼 오랫동안 존속되고, 유지됐으며, 정당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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