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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 문학계 친일문학인 명단 공개의 의미
초점 : 문학계 친일문학인 명단 공개의 의미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8.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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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31 14:44:30
문학 속의 친일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계간지 실천문학은 친일문학인 명단과 작품 목록을 공개했다. “해방 후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문학에서의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장기 기획 가운데 두 번째 순서다. 이번 명단 공개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해방 이후 처음’으로, 57년만의 일이다. 지난 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정주 친일 논란 등 개별 문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야기돼왔지만, 이렇게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42명이라는 숫자가 한꺼번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이번 명단 공개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가 힘을 보탰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의원모임’도 함께 해서, 현재 ‘친일 청산’에 얼마나 힘을 쏟고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의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친일문학인 공개 발표 자리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명단 공개와 함께 ‘모국어의 미래를 위한 참회’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작가들은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친일문학작품을 공개하고, “민족과 모국어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고 나섰다.

57년만에 밝힌 ‘훼손된 붓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족단체라고 하는 ‘광복회’의 회장이 “친일파는 다 죽고 후손만 남았으니 이제 (친일파를)용서하자”라고 이야기하는 마당에, 민족정론이라는 언론들이 친일행각에 낯붉히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당에, 새삼 이런 발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이들은 친일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계속되고 있는 역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친일을 극복하는 것이 “새로운 역사단계에 들어서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학계는 반세기가 넘도록 친일문학에 명쾌한 개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들 작품들에 대한 평가를 공식화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친일문학인들이 국정교과서에 버젓이 활개를 치고 행세함으로써 진정한 문학의 이름을 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겨레 모두에게 심대한 상처를 주었다”는 작가회의의 성명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친일 문제를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다는 절실한 고백처럼 들린다. 또한 “문인들의 명백한 과오를 호도하거나 역사바로세우기의 노력을 사회 분열로 몰아가는 수구 언론과 일부 문인들의 반역사적인 행태”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친일문학 비판은 민족의 정신적·역사적 과제로서, 정파적 이해관계에 좌우되거나 악용되어서는 안 되며, 통일시대의 민족사와 올바른 가치기준 정립을 위한 정당한 작업”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김우창 고려대 교수(영문학)는 이번 친일 문학인 명단 발표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이므로 틀린 부분은 없다”라고 전제하면서 “이제 문학인을 ‘성인’과 ‘영웅’의 자리에서 보통사람으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학하는 사람은 성인도 영웅도 아니다. 비단 친일뿐만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도 흠짐 없는 완전한 사람은 없는데, 문학인에 대해서는 완전하길 바라는 것부터가 무리”라면서, 문인에게 ‘절대도덕’을 바라는 세간의 편견부터 깨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인이 훌륭하면 그의 시를 기리면 되지, 그의 사당을 모셔놓고 제사까지 지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번 명단은 일제 폭압이 정점에 달한 중일전쟁(1937) 이후에 발표된 글만을 대상으로 했고,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론’과 ‘대동아공영권의 전쟁동원령’에 대한 옹호 여부를 확인하여 친일문학으로 규정했다.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옹호 여부’를 친일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까지 계속돼온 친일문학의 기준을 새롭게 세운다는 의미를 갖는다.

‘자발성과 내적 논리’로 친일여부 가려

김재용 원광대 교수(국문학)는 ‘친일문학의 자발성과 내적 논리’라는 논문에서, 친일문학의 기준을 민족주의에서 파시즘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친일문학에 대한 그 동안의 이해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으면 무조건 친일, 일제하의 친일적 사회단체에 속했으면 무조건 친일, 창씨개명을 했으면 친일이라고 하는 소박한 이해는 결국 친일문학의 희석화를 노리는 이들에게 말려들어 일제하의 모든 작가는 친일을 했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리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일문학에 대한 규정은 친일문학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는 이번 친일문학 명단 공개를 환영하면서, “친일파 논의는 이제 한참 논의가 될 중간시점이라고 본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지적했다. “역사란 한 번 잘못되면 바로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친일파 청산의 논의 뒤에는 청산 반대 논의가 따를 것이고, 이런 논의들이 엎치락뒤치락 계속되면서 점점 더 내면화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이다. 문학계는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친일을 단죄하러 나섰다. 이제 그 뒤를 누가 따를 것인가.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친일문학인 42명
곽종원, 김동인, 김동환, 김기진, 김문집, 김상용,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박영호, 박영희, 박태원, 백철, 서정주, 송영,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 이석훈, 이찬, 이헌구, 임학수,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주요한, 채만식, 최남선, 최재서,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홍효민
□ 대표적 친일 문학가들. 위쪽부터 이광수, 최남선, 노천명,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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