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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에서 정치로 탐색 확장… ‘이미지 공간’과 ‘번역’을 재사유하다
미학에서 정치로 탐색 확장… ‘이미지 공간’과 ‘번역’을 재사유하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3.11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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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스펙트럼과 현재성을 진단한 ‘2013 벤야민 커넥션’

국내에 벤야민이 소개된 지는 오래지만 학계의 본격적인 연구는 미진했던 편이다.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유학하던 초기 연구자들이 비판이론을 접하고, 『이성과 혁명』의 저자이자 마르크스 이후 신좌파운동의 이론가인 마르쿠제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된다. 1980년대 ‘민주화의 봄’을 외치던 국내 분위기에서 비판이론은 학계보다 사회운동의 주요한 실천적 이론으로 적용됐다. 마침 1978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가 벤야민 전집을 발간했고, 차봉희 전 한신대 교수(독어독문학과)가 <세계의문학>에 벤야민을 소개하게 된다. 마르크스, 헤겔 이후 루카치와 벤야민, 아도르노가 비판이론의 뿌리로 인식되고, 이후 독문과에서 문화사회학 과목이 개설돼 학계에서 벤야민의 수용이 이뤄진다. 이후 한동안 공백기를 가지던 벤야민 연구는 2000년 중반 그의 저서가 ‘새물결출판사’와 ‘길’에서 번역되며 활기를 띤다.

'역사'와 '아케이드'의 수렴점

대중과 만난 이번 학술대회에서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회화과)는 「이미지공간: 발터 벤야민과 현대미술」에서 벤야민의 ‘동시대성’에 주목했다. 동시대성은 벤야민에 의해 포착된 진리내용과 논리가 물리적인 시공간 또는 시대의 상이성을 뛰어넘는 보편적 소구력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강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라는 가정에 함몰되지 않고, 동시에 어떤 측면에서도 영역적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한 시대의 종교적·형이상학적·정치적·경제적 경향들의 종합적 표현을 연구의 축으로 삼아 가까운 과거와 현재를 통찰하는 인식의 잠재력. 또 수용적 측면에서 말하면, 우리가 지난 시대와 현재를 함께 이해하려 할 때 특정한 구체성을 통해 현재화되는 역사철학적 인식의 잠재적 역량이 벤야민의 동시대성”이라고 그 의미를 확장했다.

또한 강 교수는 이번 발표에서 ‘우리가 직면한 사안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지금의 장면을 멀리 떨어져

서 바라보게’ 하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예술이론을 현대미술 이해와 결부시켰다. 벤야민을 이해하는 키워드인 ‘역사’와 ‘아케이드’를 갖고, 그 수렴점으로서 ‘이미지공안’을 상정한 것이다. 그는 2010년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망이 스페인 마드리드의 라이나 소피아 미술관과 그 이듬해에 독일의 ZKM미술관에서 「아틀라스: 어떻게 등 뒤에 세계를 짊어질까?」라는 제목으로 연 전시회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찾는다. 독일 근대미술사학자인 바르부르크에 대한 오마주이자 그의 미완의 프로젝트인 이미지아틀라스 「므네모시네」가 현대미술에 던지는 질문이, 완성됐다면 서구 모더니티에 관한 최대, 최고의 고찰이 됐을 것이라는 찬사가 아쉽지 않은 『아케이드 프로젝트』(그가 자결하기까지 13년간 매달렸던 미완의 프로젝트로 『파사쥬 프로젝트』라고도 불린다)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이다.

서양철학자들의 번역에 대한 논점과 그 안에서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제』가 가지는 의미를 짚어본 발표도 있었다. 윤성우 한국외대 교수(철학과)「번역담론사의 맥락에서 본 벤야민의 번역론: 그 앞뒤」 발표에서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제』가 갖는 번역담론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전문번역가인 로렌스 베누티 미국 템플대 교수(영문학과)의 번역이론 책(『Translation Studies Reader』, Routledge 刊 ) 처음에 등장하는 글이 바로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제」 이고 가장 많이 언급, 지칭되고 있는데 반해 가장 덜 독해되는 글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번역가의 자족적 수준 넘어서야

『번역가의 과제』는 본래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파리 풍경들』을 벤야민이 직접 독일어로 번역해 출간한 책의 서문으로 실렸던 에세이다. 이 짧은 에세이에 대한 독립된 연구저서나 주석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지만, 벤야민이 말한 “모든 언어는 자체 내에서 자기 자신을 전달하며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전달의 중간자이다”라는 그의 핵심적인 언어론적 발언을 확인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적 기호 체계 이상으로 본 벤야민의 관점에 대해 윤 교수는 “벤야민은 의미중심 번역은 번역가의 현재적 활동 양상을 지적하는 번역의 한 방식일 뿐이라고 보는 것 같다”라고 말하며, 현실의 번역가가 머무르는 상태, 현실의 번역가가 만족하는 번역의 자족적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고유한 의미의 번역가가 지향해야 하는 점이라는 것이 벤야민의 번역관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벤야민과 함께 ‘원문중심주의자’로 취급되는 프랑스의 번역철학자 앙트완 베르만을 인용해, “의미중심 번역을 ‘자민족 중심번역’으로 보면, 도착언어는 전혀 ‘손댈 수 없으며 우월한 존재’가 된다”라고 의미중심번역의 비판근거로 제시했다.

“번역가의 과제란 다른 언어 속으로 추방당한 순수 언어를 자신의 언어 안으로 되가져오는 것이며, 작품 속에 잡혀 있는 순수 언어를 원작의 재창조를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벤야민은 제3언어인 ‘순수’언어가 수직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여기서 ‘순수’라는 개념은 칸트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으며, 원문에 대한 번역가의 번역과정에서 외화되기를 기다리는 ‘잠재적’ 언어이기도 하면서 출발언어와 도착언어 상태의 위대한 ‘조화’를 통해 달성되기도 하는 ‘이상적 언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 벤야민학회는 없다. 이번 학술대회는 벤야민을 사유하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교류를 열었던 첫 번째 장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철학자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을 풀어주기에 다소 고답적인 학술대회의 형식을 탈피하지 못한 점은 앞으로 풀어야할 숙제로 보인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독어독문학과)“이 학술대회는 강의실의 강의나 일반 학술대회에서의 발표와는 다르다”라고 말하며 “학술적 글쓰기와 대중적 글쓰기의 중간을 찾아, 형식적이기보다는 맥락을 이해시킬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라고 주문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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