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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할까
어떤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할까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 승인 2013.03.0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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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32)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베를린의 상징이자 한때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에 서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사진=최재목
4월 초순 쌀쌀한 새벽,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6시간 반이나 걸려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 동서 분단 시절 동독의 수도였고, 현재 통일 독일의 수도다.

 

오후, 바람이 많다. 중앙역에 내려 ‘브란덴부르크 문’을 향해 걸어간다. 다리를 건널 때, 베를린 시 중앙을 흐르는 슈프레 강물을 굽어보며 나는 나애심의 노래「과거를 묻지 마세요」(1959)를 조용히 불러본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은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가슴이 찡하다. 묻지 말라는 ‘과거’. 조지 오웰은『1984』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했는데. 지금 독일의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베를린의 상징이자 한때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선다. 감개무량! 아테네의 신전을 본 따서 만든 건조물 위에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승리의 여신이 조각돼 있다. 1961년에 세워졌던, 동서 베를린을 남북으로 나눈 약 45km의 콘크리트 장벽은 이제 허물어졌다.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과 동독 마르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었다. 이 베를린 장벽은 오랜 기간 동서독 냉전의 상징물이었으나 동유럽의 민주화로 1989년 11월 9일에 철거됐다. 이 문 앞에 운집한 10만여 명의 인파는 환호했고, 나는 TV에서 목도한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저 1967년의 ‘東伯林事件’의 ‘동백림’이 이곳 아닌가. ‘동백림’은 ‘동베를린’을 音譯한 것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동백꽃 여인』의 ‘동백’이 아니다. 참고로, 뒤마의『동백꽃 여인』은 이후 베르디가 오페라「라 트라비아타」(=방황하는 여인)로 개작했고, 일본에서는 ‘椿姬(=동백아가씨)’로 번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금지곡이었던 이미자의 노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동백아가씨」)의 ‘동백아가씨’로 친숙히 자리 잡았다. 그래서일까. 중앙정보부가 기획했던 東伯林=동베를린 사건의 ‘동백’이, 레드컴플렉스로 ‘빨갛게…’라는 내용 때문에 금지곡이 된 ‘동백 아가씨의’의 ‘동백’과 오브 랩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우리에게 독일은 결코 먼 나라가 아니었다.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친구의 航空葉書나 기다리며」(이기철,「離鄕」)라는 시처럼,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의 가난했던 꽃다운 청춘들은 독일로 향했다. 독일의 3D업종이었던 광부와 간호원을 하기 위해서다. 낯선 나라 사람의의 시신을 닦던 간호사들. 수천 미터 지하탄광에서 땀 흘리며 일한 광부들. 1964년 12월 10일, 40대 후반의 박정희는 서독 루르 탄광지대에서 광부들을 만나 인사말을 하다가 그만 울었다. 강연이 끝 난 뒤에도 눈물은 그치지 않고.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라며, 칠순의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단다.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다. 일제강점기 일본을 통해 들어오던 독일 학술문화의 품목은, 해방 이후에도 이런 식의 교류를 통해 다시 물꼬를 텄다.

1970년대 후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처음 독일어를 배웠다. 아, 베, 체, 데, 에, 에프, 게…. 그때만 해도 내 머리 속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나치정권의 비밀국가경찰 게슈타포 같은 관념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읽었던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와 같은 독일철학자들의 원서들은 어땠나. 그 억센 발음처럼, 솔직히 내 머리 속에서는 여전히 독일제 탱크처럼 차가운 지식의 철골구조물이 구르는 것 같았다.

근대일본 明治의 제국주의 學知를 지탱한 세 기둥은 ‘칸트’와 ‘양명학’과 ‘무사도’였다. 근대 국민국가의 지식은 이성적, 실천적, 혁명적이라는 사명을 품었고, 이런 트렌드가 바로 한국에도 수입돼, 무사도 대신 ‘花郞道’만 교체됐을 뿐 기본 틀은 지속됐다. 일본 北海道帝國大學과 京城帝國大學 豫科의「寮歌」(기숙사 노래)는 프랑스의 데카르트, 독일의 칸트와 쇼펜하우어, 이 세 철학자의 머리글자를 딴 일본노래「デカンショ節」(데칸쇼부시)였다. 재미없어 ‘잠 온다는’ 내용으로 패러디 된 노래다. ‘데칸쇼 데칸쇼로 반년을 지낸다. 나머지 반년은 잠자며 지낸다…데칸쇼…文武를 닦은 美少年…데칸쇼(デカンショデカンショで半年暮らす…/あとの半年ねて暮らす…デッカンショ/…文武きたえし美少年…デッカンショ)」. 이 데칸쇼부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원래 일본 兵庫?(효고현) 篠山市(사사야마시)의 백중맞이 춤의 노래 즉 봉오도리 노래(盆踊り歌)였으나 學生歌로도 애창됐단다.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는 묻는다. E.H.카는『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3.8선의 판문점이 이곳처럼 될 날은 오는 걸까.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의「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메모리얼」로 발길을 돌리며, 다시 묻는다. ‘우리가 상상할 과거는 무엇이며, 기억할 미래는 또 무엇인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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