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23:30 (금)
대학가의 할머니들-한 生涯 담긴 보따리 이고지고 대학 찾는 '큰' 부자들
대학가의 할머니들-한 生涯 담긴 보따리 이고지고 대학 찾는 '큰' 부자들
  • 교수신문
  • 승인 2002.08.3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넉넉한 손길, 얼굴없는 기부자들
“이처럼 고통스러운 운명이 또 있을까. 인생의 행복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살아온 한 생. 이제는 자식없는 설움과 고독만이 남았다. … 재산을 기증해 여러 사람이 기쁨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평생 모은 재산 10억원을 고려대에 장학금으로 내놓은 최병순 할머니의 육필수기 일부분이다. 식모살이, 품팔이, 창녀촌 빨랫일, 행상, 보모, 극장 암표상 등 안해본 일이 없는 최 할머니가 우리에게 전하려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한반도의 아픔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온갖 신산을 겪은 최 할머니는 전 재산을 내 놓으며 “이제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학에 모든 재산을 기부한 후 다시 가난해져도, 풍요롭기 그지 없는 대학가 할머니들의 마음과 그 뜻을 기려본다.

김밥할머니로 알려진 故 이복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째가 되는 올해, 대학가에 따뜻한 낭보가 연이어 전해지고 있다. 지난 4월 익명의 80대 할머니가 동국대에 13억원 상당의 오피스텔을 기증한 데 이어, 익명의 또 다른 할머니가 전남대에 1억원을, 지난 5월에는 이봉심 할머니(77)가 항공대에 2억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또 지난 6월에는 평생을 혼자 살아온 이명기 할머니(80)가 자신의 전재산인 아파트를 쾌척했으며, 지난 12일에는 공윤석 할아버지(73)가 성균관대에 13년간 노점상을 하면서 마련한 연립주택을 기증했다.

가진 것 모두 ‘보시’한 사연들

어렵게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기까지의 사연들도 각기 다르다. 공윤석 할아버지가 자신의 전 재산을 성균관대에 기부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경상도에서 철물상을 하다 화재로 전 재산을 잃어버린 공씨는 세 아들과 함께 지난 74년 서울로 상경해 남대문 지하상가에서 노점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점상이다 보니 생활이 궁핍했고, 그 과정에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막내아들이 자살했다. 젊은 시절 공부를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막내아들의 죽음이 한스러웠던 공씨는 “내 남은 재산은 셋째 아들놈 몫입니다. 어려운 형편으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써주세요”라며 성균관대에 기부의사를 전했다.

한국항공대에 기부한 이봉심 할머니의 경우도 아들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지난 3월 충북 괴산군 보광산에서 헬기를 조종하다 사고로 숨진 김학현 소령의 어머니 이봉심씨는 “아들의 정신이 장학금을 통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종사의 꿈을 꾸는 후배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며 아들의 순직 보상금 모두를 대학에 기탁했다.

“현금이 있으면 좋겠지만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 부끄럽다”며 동국대에 아파트를 기증한 이명기 할머니는 종교적 신념이 대학기부로 이어진 경우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이씨는 수십년간 방직공장에서 비단을 짜서 마련한 아파트, 즉 ‘가진 것 모두’를 ‘보시’했다.

그러나 사연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입을 맞춘 것처럼 “언론에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는 점. 동국대에 익명으로 13억원을 기증한 할머니는 “죽기 전까지는 절대 이름을 밝히지 말라”며 학교 관계자를 입단속했고, 성균관대에 집을 기증한 공씨는 학교측에 “언론에 연락처를 가르쳐주면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대개 일회적으로 그치는 대기업들의 선심성·홍보성 기부에서 엿보이는 언론지향적 성격과는 다른 모습이다.

지난 90년 김밥할머니 이복순씨가 40여년간 김밥을 팔고 여관을 운영해 모은 전 재산을 충남대에 기증하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이들 할머니들의 대학 기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연희 삯바느질 할머니, 박일분 보부상 할머니, 임순득 콩나물 할머니, 유양선 젓갈 할머니 등 보는 이를 숙연케 하는 기부의 현장에는 늘 할머니가 있었고, 할머니들의 기부는 어느새 한국대학 기부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손꼽히게 됐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보다 사회적 위치가 높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않은 사람들로부터의 기부가 기부금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기부 행위를 탈세와 편법 상속의 수단으로 삼곤 하는 부유한 특권계층의 기부문화에 비판의 메스를 대는 곳도 이 지점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할머니들의 대학 기부는 우리 사회 상층집단의 특징이라고 지적되는 ‘오블리제 없는 노블레스’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며 특권만을 원하면서 도덕적 책무에 대해서는 발을 빼는 기득권층의 특성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자선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자선만을 강조하는 시각은 문제”라면서 “기부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돕거나 후진을 양성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사회복지 제도나 조세 정책 등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정책 함께 고려해야

또한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할머니들의 선행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이어지지 않는 것은, 대학이 공적인 기능을 스스로 수행하며 투명하게 운영되는 공간이기 보다 사학재단의 소유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며 “대학 내·외적 주체들이 대학을 합리적인 공간으로 만든다면 대학들에 대한 보다 많은 기부들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정인의 소유가 될 수 있는 사립대학에 일반인들이 기부하기 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지적이었다.

덧붙여 신 교수는 “우리 나라처럼 대중적인 지지에 기초해 정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노블레스’가 전무한 풍토속에서 바람직한 기부문화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우선 기부를 금전적인 것, 즉 ‘돈’만을 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기부할 수도 있다는 식의 인식의 전환이 전반적으로 이뤄져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지배와 분단, 독재와 천박한 자본주의 시장 등으로 얽키고 설킨 역사적 질곡을 넘어 거친 삶의 밑바닥으로부터 건져 올려진 할머니들의 따스한 溫情, 그에 대한 보답으로 대학들의 투명한 개혁을 기대해본다.

허영수 기자 ysheo@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