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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이론 탈피… 공적 서비스로서의 사회학 추구해야할 때”
“서구 이론 탈피… 공적 서비스로서의 사회학 추구해야할 때”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3.04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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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 특별세미나에서 모색한 한국 사회학의 과제

지난달 28일 발간된 <한국사회학> 제47집 에는 작고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유고가 실렸다. 발간에 하루 앞서 한국사회과학자료원(원장 한준 연세대)에서 열린 특별세미나는 경험적 사회학과 이론적 사회학 모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성취를 이뤘던 부르디외의 20년 전 원고를 소개하고, 이 원고가 오늘 한국사회에와 한국사회학계에 던지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였다.

제자 로익 바캉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에 의해 발굴된 이번 원고에서 부르디외는 사회학 고유의 학문적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CNRS에서 수여한 금메달을 받으며 개이적 기쁨을 누리기에 앞서, 저는 사회학에 대해 제기되는 몇 가지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성찰하고 싶습니다. 첫째, 사회학은 자신에게 고유한 방법, 개념모델들을 갖고 있는 견고한 경험과학입니다. 사회학의 과학성이 종종 문제시되는 이유는, 사회학이 상식에 기초하고 있고, 저널리즘적 정보와 가까운 비과학적 담론체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과학성을 객관화시켜 성찰하는 급진적 자기-성찰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런 사회학의 성찰성은 과학장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의 형태로 다른 학문들에 대해 적용됩니다. 사회학은 과학적 인식을 절대시하는 대신, 과학장의 구조적 구성과 작동을 분석함으로써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무의식을 비판적으로 드러냅니다. 셋째, 시장의 권력이 점점 더 강화되고, 국가가 과학을 시민을 조작하는 도구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는 이 시점에, 사회학은 비판적 대항-권력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또한 기능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은 공적 서비스로서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 요약한다면 사회학이 받고 있는 오해와 부당한 처우에 대한 지적인 셈이다.

500년 이상 분과학문 체제를 유지해온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비해 역사가 짧은 사회학은 그동안 학문으로서의 지위와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받았다. 후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타 학문에 대해 비판을 가해 온 것도 사회학을 과학의 하나, 자립적인 학문의 한 영역으로 서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부르디외가 연설문에서 요구한 핵심 역시 사회학의 학문적 지위에 대한 온당한 대우와 더불어 앞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사회학자들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었다.

1993년에 작성된 부르디외의 원고는 2013년 한국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정확히 20년이 지난 오늘, 이 짧은 글이 한국사회에서 더 큰 울림을 갖는다고 말하는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과)는 “프랑스처럼 솔리드한 사회를 갖지 못했던 한국은 통합부재, 소통문제, 복지의 문제 등에 대해 누가 풀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라는 많은 질문에 부딪혀 있다”라고 말하며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부르디외가 20년 전에 앞서 질문을 던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 이래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민주주의의 위기,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약화, 개인화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만연, 시민의 전반적 탈정치화, 사회의 기업화와 경제적 이성의 팽창, 비판적 사회과학의 침체, 그리고 각종 사회병리현상의 증폭(양극화, 고령화, 높은 자살률, 신종범죄, 신뢰의 하락 등)과 같은 현상들 앞에서 부르디외의 이 글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의 현재와 미래를 관찰, 구상, 설계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고민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사회학의 위기가 사회의 위기라고 말한다. 이번 원고를 번역하며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말하는 김홍중 서울대 교수는 “늘 한국사회학에 제기됐던 서구이론에 대한 외경, 그 극복의 가능성이 이 글을 읽으면서 느껴졌다”라고 말하며 “거대한 이론의 체계는 압도적이지만 그 아래 깔려 있는 고민은 유사하다. 부르디외의 이 글이 한국의 사회학자들에게 어떻게 부르디외를 넘어설 수 있는지 단초가 될 것 같다”라고 부르디외의 이 원고가 현재 한국 사회학자들에게 주는 의미를 찾았다. 그는 루만, 푸코, 하버마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연구된 부르디외에 대해 저서에 대한 전체번역이 어렵다면 오역을 잡는 작업에서부터 학술적 작업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1993년 CNRS에서 금메달을 수여받고 연설문을 읽고 있는 피에르 부르디외
피에르 부르디외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20세기 후반 유럽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의 한 사람이다. 독일에 위르겐 하버마스와 니클라스 루만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부르디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하버마스와 루만이 순수한 이론가라는 점에서 보면, 부르디외는 이론과 경험연구를 겸비한 사회학자다. 1930년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지역 우편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부르디외는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 알제리대 조교수로 카빌리 현장을 발로 뛰며 인류학 조사연구를 실시했고, 1964년 고등연구원의 연구책임자로 레이몽 아롱과 함께 연구를 수행했다.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권력지배, 사회의 병리적 문제에 대해 비판해왔던 그는 1968년 5월 혁명 당시 프랑스 대학의 학생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교수였다.

알제리 현장조사의 경험은 이후 부르디외 사회학의 뼈대를 이루게 되는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사회를 분화된 다양한 공간(그가 場, field 라고 부르는)으로 파악하는 그의 사회학은 다양한 장들(문화적 장, 정치적 장, 경제적 장)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인간을 그 장에서 행위하는 실천적 존재로 파악한다.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인간들의 사회적 행위를 규정하는 상징과 문화의 힘이었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날카로웠던 그는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문화적 불평등 그리고 상징적 폭력에 대한 정교한 사회학적 연구를 계속했다.

1979년 『La distinction(구별짓기)』를 발표하고 1981년 꼴레쥬드프랑스 사회학분과위원장으로 취임한 그에게 1980년대는 저술활동을 통해 학자로서 최전성기였고, 1990년대는 앵글로색슨 주도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참여지식인으로서 최전성기를 보냈다. 20세기 후반 사회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는, 저서 『호모아카데미쿠스』에서 비판의 날을 더욱 세웠다. 실명을 거론하며 동료와 선후배, 심지어 사제관계에 있어서까지 가혹할 정도로 학문적 성찰을 요구했던 것.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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