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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는 희망
근거없는 희망
  • 박순성 /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2.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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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백 년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천 년의 일을 고민한다지만, 결국에 우리는 모두 죽는다. 이런 말을 떠올리고는 종종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최근의 일이다. 삶의 유한함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꼴이다. 영원한 삶을 얻은 쿠마의 마녀가 오그라든 몸으로 새장에 갇혀서는, 죽고 싶다고 절규했다던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며 살던 우르슬라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기도와 충고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했었지. 포기한 미래는 우리에게 헛된, 그러나 그 무엇도 가져다줄 수 없는 안식을 준다.

때로는 인류의 역사를 보면서 희망을 갖는다. 새로운 봄이면 점점 더 자주 불어오는 두터운 모래바람이나 7월보다 8월에 더 많이 쏟아지는 비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나름대로 해답을 가지고 있다. 모래에 파묻히거나 나무에 뒤덮여 사라졌던 도시들이 호기심에 굶주린 사람들의 손으로 깨어나, 인간과 신 사이에 경계가 없던 시대가 있었음을 가르쳐준다. 인간의 역사는 영원하고, 지금의 삶 역시 신화로 재생시켜 줄 것이다. 믿음은 굳건하다. 바다에 가라앉은 대륙을 분명 우리는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처한 운명의 낙관적 얼굴만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재주라면, 근거 없는 희망에 즐거워할 줄 아는 것도 커다란 특기다. 더구나 미래를 포기하지도 역사에 매달리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일상을 꾸미고 또 꾸려 나가는 능력은 타고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몇 백 만을 넘는 사람들이 똑같은 색깔로 치장하고 열광하던 거리가 텅 비었는데도 여전히 신바람을 이야기하고 힘찬 기운과 강한 정신을 논하는 용기는 부끄러움이 없다. 아직도 들끓는 우리 자신들의 바로 이 소란스러움이 우리의 소란스러움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가.

어디 이러한 소란스러움뿐인가. 기대가 실낱 같이 되어도 짐짓 태연한 척 비판의 정신을 유지하는 이들이나 지도자의 잘못을 으레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여주는 대범한 마음을 가진 이들 모두 부러울 것이 없다. 정치는 대중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태연함과 대범함으로부터 희망이 솟아난다. 과오를 뛰어넘는 정치가들은 대중의 호연지기를 실현해 주는 꼭두각시들이다. 아, 이 모든 축복들.

역사가는 일어날 수도 있었을 다른 사태를 상상하지 않고, 행동가는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는데, 왜 나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문을 찾으려고’(백 년 동안의 고독) 일상의 여기저기를 하염없이 헤매고 다니는가.

참, 이 글의 제목이 ‘근거 없는 절망’이었나.

박순성 / 편집기획위원·동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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