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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적 지식인’을 향한 열망“중국은 문명적 자각 필요하다”
‘공공적 지식인’을 향한 열망“중국은 문명적 자각 필요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2.19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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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현대 지식인의 사상적 부활』 쉬지린 지음|송인재 옮김|글항아리|600쪽|27,000원

쉬지린(許紀霖)은 20세기 중국사상사와 지식인 연구의 권위자로 중국 화동사법대 역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가 지식인의 부활과 재탄생을 모색하고자 계몽이란 개념을 재조명하면서 ‘공공적 지식인’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급부상한 중국의 세계적 위상은 결국 19세기 중반부터 존재해왔던 强國夢의 실현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은 진정 도덕적 대국이 되기 위한 담론적·문명적 경쟁력을 가졌는가?”라며 중국 지식인 사회에 일침을 던졌다.

이 책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원제 啓蒙如何起死回生, 2011)에서다. 중국 지식인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쉬지린의 문제제기와 그 사유가 집대성된 이 책은 계몽, 지식인, 공공성, 문명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키워드로 그린 구도 속에서 근현대 중국 지식인의 상황을 사회적 위상의 변화, 사상적 진로라는 측면에서 꼼꼼하게 조망하면서, 도덕적 대국으로서의 고민을 펼치기 위한 다양한 제안을 내놓는다. 공공적 지식인의 형성과 부활은 그런 제안의 핵심이랄 수 있다. 철학자 칸트가 활용함으로써 ‘빛’을 강력하게 발휘하게 된 ‘계몽(Enlightment)’을 쉬지린이 중국식 버전으로 맞바꾼 셈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이 문명을 향한 야망 대신 부강을 향한 욕망만이 가득한 사회가 된 것은 ‘문명적 자각’의 부재, 즉 진화론과 사회다윈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정말 중요한 문제틀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는 서문에서 중국 정치의 혼란기를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중국의 주요 사상가들이 그 당시 시급히 논했던 정치질서와 정신질서의 위기를 고찰한 뒤 특히 제도적 자각에서 더 나아간 문화적 자각, 그리고 세계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늘 염두에 두는 문명적 자각이 현재 중국 지식계에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경쟁과 優勝劣敗라는 사고를 받아들인 19세기말 중국의 풍경 분석에서 나온다. 쉬지린은 물질적 강대국을 향해 질주했던 중국의 과거사를 들춰내면서 특히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식 사고가 중국의 두 교체기(19세기와 20세기,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역사상 유례없는 경쟁적 분위기를 조장했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와 같은 사고는 중국(인)을 변화시켰고 강대한 정신적 동력을 지탱하는 요인이 됐지만, 실상 “이 경쟁동력의 배후에는 바로 낙후함에 대한 공포, 도태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쉬지린은 한국 학계와 지식사회에 ‘중국 지식인 연구’로 꽤나 알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근 20년간 지식인 연구야말로 중국 학계의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쉬지린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말까지 중국의 지식인 연구는 두 방향에서 진행됐다. 하나는 전통과 근대의 이원적 구분에 따라 전통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지식인의 문화적 선택과 내재적인 사사상문화적 충들을 분석하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학술과 정치 사이의 사회적 역할에 착안해, 지식인이 근대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적 지위를 실현하는가를 연구하고 전환시대 지식인의 정치적 운명과 그들이 어떻게 독립적 인격을 상실했다가 재건하는지를 중점적으로 고찰하는 방향이다. 쉬지린은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시민사회 이론을 중국 사회 연구에 응용하려했던 미국내 중국학 연구자들과 거리를 두면서, ‘중국의 경험’을 응시할 것을 강조했다. 이 ‘중국의 경험’에서 쉬지린이 시선을 집중한 곳이 바로 중국 지식인 형태의 변천이다.

그는 유럽과 미국 지식인의 형성 과정과 그 쇠퇴의 풍경에 수반됐던 대학의 확산, 문화의 사업화, 근대 지식의 분업체제와 자본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상업체제의 결합을 통한 공공 지식인의 소멸이 중국에서도 1980년대 이후 20년 이내로 압축돼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장사회가 등장했을 때, 통일된 지식계는 없어졌고, 공공문화생활은 심각하게 균열됐다.

 책을 옮긴 송인재 한림대 연구교수는 해제에서, 저자가 역사주의 비판을 통해 일관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 문화상대주의, 허무주의 경향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자체의 근대성 혹은 문화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주로 오늘날의 중국적 입장과 맥락을 강조하는 논조로 최근 들어 더욱 강렬해졌는데, 쉬지린은 이런 경향에서 반계몽, 보편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항을 읽어내고 이것들을 ‘역사주의’라고 규정한다. 바로 여기서 쉬지린은 최근 중국의 반계몽(반서구)적, 특수주의적, 민족주의적 경향을 경계하면서 계몽과 문명에 입각한 보편의 길을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이 때문에 쉬지린의 “역사주의 비판은, 오늘날 중국에 팽배해 있는 ‘중국 모델론’이라는 담론에 경종을 울리고 중국의 진로에 대한 더욱 객관적인 접근을 촉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송인재가 지적했듯 저자가 말하는 문명을 통한 보편적 ‘대국’ 중국이란 기실 그가 역사주의라 비판했던 간양(甘陽)의 ‘문명국가’ 담론과 공통분모가 있다. 전근대의 신학, 유교라는 과거의 원형에서 보편적 가치를 모색함으로써 보편을 신화나 향수의 수준으로 조준한 것도 그렇다. ‘계몽 부활’만 외칠 게 아니라, 계몽에 새생명을 줄 수 있는 내재적 면모를 찾아 설계도를 만들어보라는 번역자의 주문에 동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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