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 번역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과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한문만 잘 하면 한 사람이 문사철 분야 다 할 수 있거든요. 그나마 이 시기마저 놓치면 과도적인 이 번역마저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죠. 그래서 번역대학원대학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된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담일시: 2013년 2월 6일 오후 2시
대담: 최익현 편집국장
사진·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서울 종로구 세검정 자하문에서 구기터널 쪽으로 넘어가면 터널 못 미쳐 오른쪽에 위치한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이동환)을 만날 수 있다. 흔히 ‘터널’은 은유적 의미로 ‘새로운 세계의 직전 상태’를 의미한다. 일본의 어느 작가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밤의 바닥이 새하얗게 변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와 관련 있다. 구기터널 근처에 위치한 한국고전번역원의 위상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전통 古典籍을 현대 모국어로 다시 옮겨내는 작업을 이들이 도맡아 진행함으로써, 전통문화에서 새로운 미래를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 고전번역 기구였던 ‘민족문화추진위회’(1965)가 한국고전번역원(이하 번역원)으로 새롭게 출발한 것은 지난 2007년 11월의 일이다. 기치는 우리 조상들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한문고전의 수집·정리·번역을 통해 한국학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고 나아가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함이다. 국가출연기관이 된 뒤 번역원은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굵직한 사업만 해도 △문집번역사업 △역사문헌번역사업 △특수고전번역사업 △인재양성사업 △원전정리 및 공구서 편찬사업 △번역고전 대중화사업 등이 있다. 초대원장(2007~2010)이었던 박석무 씨에 이어 3년 임기의 제2대 원장으로 이동환 고려대 명예교수(73세·한문학)가 취임한 것은 2010년 11월이었다. 디지털시대로 깊이 건너온 지금, 고전번역의 의미와 중요성, 고전의 대중화와 고전번역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번역원의 최대과제는 고전번역 성과의 학계 공유와 대중화, 그리고 종합적인 고전번역인재 양성으로 모아진다. 이동환 원장을 지난 6일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실에서 만났다.
△ 고려대 한문학과 60학번이시더군요. 문사철 인문교육을 깊이 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고전번역은 왜 중요한가요. “고전번역은 개인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대역사라고 생각해요. 유사 이래 한문체제로 우리 문화가 구축돼 왔는데, 대략 2천 년 넘는 시간이죠. 개화기 이전에는 특히 우리 전통 상층문화는 한문으로 구축돼 있었고요. 한문으로 구축된 것을 번역도 안하고 그냥두면 역사가 없는, 문화가 없는 민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소수의 그 방면 전공자만이 알 뿐이죠. 그런데 연구자조차도 한문능력이 점점 떨어져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계승하기 어려워진 게 오늘의 상황입니다. 이제 이것을 개인차원을 넘어서 민족적 차원, 즉 완전히 한글체제로 가는 것이 우리 과제가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문체제를 완전히 뒤엎고 거기서부터 한글 체제로 ‘한글고전’을 새로 수립해야 합니다.”
△ 전문 연구자의 부재, 대학 시스템에서의 주변화, 국가적 지원 미비 등이 어울려서 그간 고전번역이 표류됐다면, 대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승정원일기』 하나만 예를 들어 볼까요? 현재의 인력으로 완역하려면 대략 90~100년이 걸립니다. 역사문헌 뿐 아니라 문집과 실록 외에도 특수고전(중복된 것을 감안한다면 대략 1천 종 정도로 추산)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특수고전이란 어떤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만든 책을 말합니다. 같은 양의 책을 놓고 볼 때 문집이나 역사문헌보다 밀도와 집중성이 더 높은 고전이랄 수 있지요. 그 동안 번역에서 배제돼 있던 것을 작년에 별도의 번역실을 열어 올해부터 적극적으로 번역해 갈 계획입니다. 여기에 문집 중에서 뽑혀진 1천300 종,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역사문헌 5천570 책 중 극히 일부분이 겨우 번역됐을 뿐입니다. 이들 고전을 현재 인력으로 번역한다면 90년에서 100년이 소요되는 것으로 예측합니다. 일반 대학이나 민간에서 할 수 없는 규모라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고전번역이 표류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업을 대학이 감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국가출연기관이 된 뒤 번역원이 활기를 띠고 있다는 평도 많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제가 여기 번역원장으로 오기 전에 1995년쯤인가 한국한문학회장으로 있을 때 교과부 정책 과제를 하나 했던 게 있습니다. 요지는 고전번역 아카데미를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한문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매우 저하돼 있고, 그러다보니 오역과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좋은 번역 결과물을 낼 수 없습니다. 좀 더 체계적인 방향에서 ‘고전번역대학원대학’을 모색하자는 의견이 많습니다. 이를 위한 기초조건으로서 번역원 청사를 새로 준비하고 있는데, 올 후반기에 공사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성북구 동소문동에 건평 2천300평 규모입니다. 번역원의 숙원사업으로 2년 노력해서 작년에 인가를 받았습니다. 또 예전에는 성낙훈, 조규철, 신호열 같은 한학에 뛰어나신 분들이 민추 원고를 교열했습니다. 지금은 공동번역 시스템을 만들어서 번역을 진행하고 있죠. 중지를 모아 번역원고를 말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최종적으로 여러사람이 풀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는 원로자문단도 구성했습니다. 순전히 한문만 해 온 분들이죠. 전국에 걸쳐 자문단을 구성해보니 예닐곱 분 정도 되더군요. 이 분들은 번역이든 標點이든 질적으로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 외 원전의 교감 표점을 번역자가 하는 것과, 특수고전번역실을 신설해 역점을 두고 있는 것도 변화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일제강점기 근대문집 조사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한문의 저변인구를 확대하고 그 중에서 전문가를 찾아내려는 작업도 확대됐습니다. 종래의 교육원 교육과정을 전문과정 2년에서, 전문과정 1, 2로 각각 2년씩으로 늘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문과정 4년이 됩니다. 종래 연수과정을 포함해 5년 만에 교육원을 졸업했지만 이제는 7년이 걸리게 된 것이죠. 이 때문에 요즘에는 괜찮은 인재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평을 듣습니다. 안타깝게도 공공기관 285개 가운데 번역원의 수준은 가장 하위권에 속합니다. 그래서 기본 베이스를 10% 상향 조정해서 겨우 200위권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인재들이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는 기본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 올해까지가 임기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전번역 활성화를 위해 정부에 바람이 있다면. “고전번역이라는 게 민족적 대역사고 한문체제를 한글체제로 바꾸는 장기적 사업이라면, 고전번역에 대한 당국자의 인식이 많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책이네, 해서는 뭐하나 하는 부정적, 근시안적인 시선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기재부에 번역원 예산 관계로 찾아 갔을 때, 고전을 즐겨 읽는 한 공무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고전을 통해 지적 상상력을 자극받고 인간적 품위를 높일 수 있다면서 고전번역의 필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더군요. 이렇게 개인적 경험이 국가적으로 확장되면 국격을 높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고전번역이 활성화되는 데는 무엇보다 예산 문제가 해결돼야 합니다. 좋은 인재를 기르고, 장기적 계획에 따라 번역작업을 정확히 해나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인식도 변화해야 합니다. 번역원이 고전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 앞으로 중요한 계획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실 지금 번역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과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한문만 잘 하면 한 사람이 文史哲 및 특수고전 분야를 다 감당해야 되거든요. 학문적으로 보면 아마추어 수준을 면하기 어렵죠. 그나마 이 시기마저 놓치면 과도적 번역마저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죠. 그래서 지금 당장은 번역의 오류와 오역을 최소화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정상적인 번역을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 번역대학원대학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된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인재를 기르는 일은 일반대학원에서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대학원대학에서 맞춤형으로 인재를 길러내자는 것이죠. 지금은 학위과정과 한문과정이 분리돼 아주 비효율적인데다가 ‘맞춤형 인재’를 길러내기 어렵게 돼 있어요. 이걸 일체화해서 석·박사만 배출하는 대학원대학을 만들어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문가가 되는, 그래서 번역이 전문적으로 잘 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록 현대화도 좀 더 박차를 가할 계획입니다.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요. 지금 우리 번역은 태백산 사고본과 정족산 사고본을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원문DB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들었는데, 글자간의 출입이 많아 하나 하나 낱글자의 교감을 거쳐 번역하고 있습니다. 번역의 오류는 계속 발견되고 있는데 독자들이 지적해 준 것만해도 5만 건이 넘습니다. 그래서 원문의 교감·표점을 거쳐 오류나 미숙한 표현을 하나 하나 잡아내어 고쳐 가는거죠. 기존번역서에 소략하게 된 주석을 대폭 보강하고, 긴 설명이 필요한 역사 용어의 해설까지 곁들이는 것, 이것이 실록 현대화 작업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번역원의 성과를 학자들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부분입니다. 특히 역사 연구자나 철학하는 사람들은 文集을 잘 보려하지 않습니다. 문집은 통합적 지식인이 당대의 모든 정수를 담아낸, 일종의 시대정신, 기호, 사고의 총체적인 산물 아닙니까. 임진왜란때 동래부사 송상현을 다룬 신흠의 『송동래전』만 봐도 이 전쟁과 관련된 절절한 내용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런 부분을 읽는 역사학자는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퇴계의 시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퇴계의 이기론을 분석할 수 있을까요? 역사학자 이우성 선생의 사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집에 담긴 시대의 에스프리를 읽어내고 이를 역사 고유의 객관적 시각과 융합해냈기 때문에 그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가 될 수 있었던 거죠. 객관적인 것도 좋지만, 에스프리가 없는 글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