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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크라카우어-벤야민의 계보
짐멜-크라카우어-벤야민의 계보
  • 교수신문
  • 승인 2013.01.0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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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주말 동안 막 번역돼 나온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를 읽었다. 이 책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니콜 라피에르의 근사한 제목의 책 덕분이다. ‘정주하지 않는 지식인의 삶과 사유’라는 부제가 달린 라피에르의 책은 발터 벤야민을 둘러싼 흥미로운 지성사를 그려내고 있다. 1980년대에 한국에 소개된 벤야민은 아도르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자 미학적인 차원에서 소개돼 왔고, 최근에는 아감벤의 독해를 중심으로 칼 슈미트와 함께 바이마르 지성사의 뇌관을 건드릴만한 주권론과 정치 철학자로 읽히고 있다.

여기에 정당하게 소개돼야 할 차원이 짐멜-크라카우어-벤야민으로 이어지는 ‘파리아’로서의 지식인이다. 이방인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파리아(Paria)는 자신들의 책이 모두 불태워지고, 베를린을 떠나 프랑스의 한 호텔 방에서 지내다 수용소에 감금된 크라카우어에게도 매우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라피에르는 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산책자는 망명자가 됐고, 그의 삶과 사유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떠도는 신세가 됐다.” 망명 지식인과 영화적 가능성 짐멜을 스승으로 삼고, 벤야민과 지적 교분을 나눴던 이 걸출한 산책자는 1941년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명한 영화책 두 권을 쓴다. 그 중 하나가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1947)라는 영화사회학의 초석이 된 저작이다.

마을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피리부는 사나이인 칼리가리의 초상은 히틀러의 출현을 예고하는 묵시록이었고, 「메트로폴리스」의 반유대주의는 혁명을 전복시켜 버리는 무기력함의 상징이었다. 1960년에는 『영화 이론』을 완성한다. 부제인 ‘물리적 현실의 구원’에서 엿볼 수 있듯 사진과의 연장선상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크라카우어는 영화를 통해 물리적 현실의 구원 가능성을 탐색한다. 짐멜-크라카우어-벤야민의 계보 속에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총체적인 것을 거부한다. 아니, 총체적이지 않은 것이 바로 현실이다. 우리는 결코 사회에 대해, 세계에 대해, 인간에 대해 총체적인 상을 얻을 수가 없다. 지성, 감성, 행위 등이 모두 파편화 돼 있는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체성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들은 거짓이다. 크라카우어에게 리얼리즘이란 사실의 파편성과 우연성을 일정한 의미 안으로 통합시키지 않고 드러내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파편들은 총체성에 도달 할 수 없게 방해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잠재적 총체성을 향한 기대 또한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크라카우어에게 구원은 종교적 의미이기보다는 쓸모 없다고 잘못 생각된 대상을 재활용해 얻어내는 무엇이며, 이러한 사유의 태도는 그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 발터 벤야민은 그를 두고 ‘어슴프레한 새벽의 넝마주이’라고 불렀다. 넝마주이의 역사 개입과 구원의 탐색 짐멜-크라카우어-벤야민으로 이어지는 이 계보에는 ‘넝마주이’의 역사에 대한 개입과 구원의 탐색을 확인할 수 있다. 크라카우어의 유작 『역사』는 그가 사진과 영화를 통해 익힌 파편들의 넝마주이를 역사를 통해 부활시킨다. “역사와 사진의 유비관계는 역사 영역 내의 습관적인 측면들을 생소화시켜준다.”(76쪽) “역사와 사진의 유비관계는 역사 영역 안의 관습적인 측면들을 낯설게 해준다”라고 번역했다면 더 좋았을 이 문장은 사진과 영화를 통해 역사를 새롭게 읽을 독해 가능성을 천명한다. 그가 영화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우발의 영역, 새로운 시작의 영역이기도 하다. 역사에서 발견되거나 추출되는 모든 규칙성은 적용 범위에 한계가 있다.”(46쪽) 그러므로 크라카우어의 방법은 새로운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역사 학계에서 수용한 방식의 단초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방법론에 도달할 역사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은 크라카우어가 ‘대기실의 사유’라고 부르는 곳이자 ‘끝에서 두 번째 세계’다.

이곳으로 소환된 역사가는 부르크하르트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산초 판사’로 “산초 판사는 여러 해에 걸쳐 아무도 모르게 밤늦게까지 수많은 기사담과 모험담을 탐독했고, 이로써 자신의 마성을 벗어던지는 데 성공했다.” 이 마성은 역사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돈키호테다. 마성을 집어 던진 산초 판사는 모험을 직접하는 대신 돈키호테의 모험으로부터 엄청나고 교훈적인 재미를 얻었다. 크라카우어는 니체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부르크하르트를 대비시키면서, 산초 판사의 자리를 독자에게 권유한다. 이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예외상태』에서 카프카의 「신임변호사」를 빌려 연구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궁리하는 법을 보여주는 신임변호사인 부케팔로스와 겹쳐진다. 넝마주이들에게 역사와 법은 전체주의와 폭력을 집행하기위해 쓰이기보다는, 연구되고 궁리되기만 함으로써 유지되는 상태이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법과 역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다시금 궁리하게 만든다.


이상용 영화평론가·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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