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년간 서울의 거리에는 ‘공공미술’을 표방한 많은 미술 작품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청계천에 있는 올덴버그의 ‘스프링’을 비롯해 한때 동대문 운동장으로 불린 장소에 이라크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가 새로운 건물 디자인을 맡으면서 공공조각과 디자인은 이제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또한 서울대학교 미술관을 디자인한 렘 쿨하스, 리윰 미술관을 디자인한 장 누벨 등에 이르기까지 이제 외국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건물을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가시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공공성’이라는 이름은 쉽게 와 닿지 않는 개념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모든 건물에 들어가는 조각이 공공적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공공미술이라는 이름 하에서 작가에게 의뢰된 경우, 과연 어떤 것이 공공성을 담보로 하는 것인지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 미술, 문화계에서는 ‘공공미술’, ‘장소특정형 미술(site-specific art)’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많은 학술적인 논의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공공조각과 디자인은 지나치게 정부 주도적이어서 이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 지어진 서울청사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나 조만간 마무리될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나오고 있다. 시청 건물에 대해 지나치게 유리를 많이 사용했다느니, 처음부터 건축가는 시공시 배제됐다든지, 공간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여러 평가가 있었다. 시청 건물을 짓는데 개인이나 기업의 자금이 아닌, 국가의 세금을 사용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평가(혹은 혹평)를 내리는 것은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 디자인이 각기 다른 정치적 견해 위에서 이미 쟁점화되고, 정치화된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은 고민해볼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애초에 I.M. 페이가 루브르 미술관 앞에 삼각형 모형의 피라미드형 유리 건축물을 디자인했을 때 파리 시민들은 이 디자인이 흉측하다고 평가했다. 현대적으로 보이는 퐁피두 센터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흉물로 비춰졌다. 건물이 도시 속에서 사람들과 호흡하고 동시대성적 역사 속에서 함께 함으로써, 사람들은 건물에 애착을 갖게 된다. 즉, 시간성과 이와 함께 축적되는 기억은 필수요소다. 공공조각으로 세워진 작품들과 공공디자인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원래의 지점으로 되돌아가 개인과 집단,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관계성’을 다시 조망해보는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이름을 건 디자인은 적어도 어떤 커뮤니티를 위해 존재하는지를 규정해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장-뤽 낭시가 1996년에 쓴 『단수이자 복수로서의 존재』와도 일맥상통하는 커뮤니티이다. 낭시는 공동체의 의미로 복수형 ‘우리(We)’라는 개념에 개별성이나 단수적 정체성을 해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복수성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함께함’이 없는 존재는 없으며, 공존없는 존재란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이러한 공존에는 ‘나(I)’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공유되지 않으면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이 지점에서 내가 좋아하고 비판하는 대상이 청계천의 올덴버그인가, 자하 하디드의 건물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소통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잘 진행되는지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반대하는 ‘논쟁적인 어조’도 모두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가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인을 만족시키는 디자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인을 만족시키는 예술작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가나 특정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라면, 국민과 시민들의 의견이 표출될 수 있는 소통의 창구가 있어야 한다. 현대의 도시 공간은 지나치게 기능위주의 디자인으로 전개됐다.
이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도시 공간은 때로는 폭력적일 정도로 녹지공간이 부족하며, 여전히 많은 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단기간에 세워지는 예술작품이나 건축물은 우리의 호흡을 더욱 더 가파르게 한다. 또한 예술과 디자인은 도시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심리적인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경쟁구도와 정치구도 속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예술과 디자인, 건축이 자체의 존재론에 따라 발전하고, 분야끼리 서로 융·복합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이 구축돼야 한다.
정연심 홍익대·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