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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주소 사업이 놓친 것
새주소 사업이 놓친 것
  • 손희하 전남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3.01.03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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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지난 11월,‘ 전남지역 마한 소국과 백제’를 주제로 한 백제학회 학술회의 종합토론 자리에 불려나간 적이 있다. 국어학자, 그것도 한국지명학회장 정도가 나오면 문헌자료에 나오는 옛 역사 지명에 대해서 뭔가 신통하고 시원스런 대답이 나오리라 기대해서 불렀을 터지만 아쉽게도 기대에 부응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의 지명 비정 연구 결과(필연적이고도 충분한 다른 근거를 찾지 못한 채 음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내놓는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대해 수긍하는 답을 드리기 곤란하며 연구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조언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명학은 지명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명은 인간의 생활터전에 대한 명명으로 해당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생활문화, 곧 자연 속 인간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정보가 들어 있는 언어문화 유산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통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옛말을 화석처럼 담고 있기도 하다.

기실 오늘날 학문 현실에서 보면 지명을 연구하는 지명학은 학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이는 여러 학문에 걸친 복합적이고 통섭적인 학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다가 지명 연구에서는 현장조사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경비와 시간을 들여 멀리까지 차를 타고 가야하고 하루종일 품을 팔아도 한두 마을 조사하는 게 고작이니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짜내는 타 학문에 비해 연구자조차 적을 수밖에 없는 것도 요즘으로서는 당연한 세태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택지 조성, 댐 공사 등 지형 변개에 따라 지명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으며, 나온 조사보고서마저도 어떤 것은 현장조사 없이『한국지명총람』의 조사정리를 답보하는 데 그친 것이 대다수여서 매우 아쉽다. 심한 경우, 한글학회 것을 거의 그대로 전재한 몇 쪽짜리 보고서도 있다. 지형이 변개되면 마을주민이 이주하게 되고, 마을주민이 이주하게 되면 마을주민이 뿔뿔이 흩어져 부르던 지명은 점차 기억에서 지워지며 지명과 함께 한 이들의 문화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최근 새주소 사업 시행에 따라 전래 지명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동명 대신에 도로명 주소를 쓰도록 하는데, 이 도로명 주소를 전통성과 역사성을 무시한 채 유연성 없이 새롭게 마구 지었기 때문이다.

지명이 생활문화와 자연환경을 반영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이 아니라 그저 길 찾기나 주소 관리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명이 단순한 길 찾기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선진국 등 다른 나라나 유엔 등의 기구에서는 지명을 문화유산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추세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동안 지명 연구를 보면 지명사전이나 지명 유래집의 발간과 지명 조사가 시급하고도 절실하다. 국회는 지형 변개 지역의 지명 지표조사를 의무 사항으로 입법하고, 연구자를 비롯한 시민과 시민단체는 더욱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나서서 지명을 조사하고 보존할 대책을 세우고, 국가 차원의 전국 지명 조사를 하루빨리 하기를 건의한다. 지명 조사는 한 개인이 단 몇 년의 연구 사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장기간에 걸친 조사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관계기관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과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의 차원을 넘어서서 국무총리실 이상의 기획이 필요하다. 북한에서도 방대한 지명 총람이 이미 나왔는데도, 이제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민간 학술단체인 한글학회의『한국 지명 총람』을 제외하고는 국가 차원의 전국 지명조사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치밀하고 튼실한 전국 지명 조사가 이뤄질 때 독도 영유권 문제, 잃어버린 녹둔도, 간도 문제와 같은 일이 새삼스럽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들 영토 문제 해결에도 지명의 유래, 어원 탐구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토대 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희하 전남대·국어국문학과
전남대 박사. 한국지명학회장을 맡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한국지명유래집: 전라·제주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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