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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都의 관문이 된 경부선 종착역 탈향·민주화·시간을 가속하다
首都의 관문이 된 경부선 종착역 탈향·민주화·시간을 가속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2.12.2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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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15> 서울역

▲ 일제 강점기 건축 중인 경성역 전경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서울역, 이곳은 脫鄕의 대표 장소다. 기차를 타고 도심의 불빛이 서울임을 알리는 어느 한 지점에 들어서노라면 바퀴소리가 유난히 머뭇거리듯 덜커덩거린다. 일제 때 세워진 철교, 한강 다리에 들어선 것이다. 한때 “한강이다”란 소리를 지르며 서울에 온 것을 실감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열차 칸 사이로 쳐다보이는 한강물은 ‘서울’이라는 ‘낯설음’의 장소에 ‘몸’을 맡기려는 사람들에겐 더욱 차가워 보인다. 그런 한강을 조금 지나노라면 ‘서울역’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서울’은 전통적으로, 아니 1394년 이성계의 한양 천도 이래로, ‘역사의 중심’에 진입한 사람들의 활동 공간이거나 돈, 명예, 권력이 집중되는 곳으로 군림해 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걸친 기회의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런 공간 한 곳에 위치한 서울역은 경부선, 호남선 등 우리나라 중요 철도의 기점으로 서울과 전국을 이어주는 관문 역할을 해왔다.

착취와 피땀의 근대 표상
서울역은 1900년 7월 8일 경부선의 경성역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그 후 1905년 3월 24일 남대문역으로 개칭했다가 1915년 10월 15일에 다시 경성역이 된다. 1925년 9월 30일 서울역사가 준공됐는데, 도로면을 기준으로 2층, 철로에서는 3층이다. 이 시기의 다른 역사들과 마찬가지로 철근 콘크리트에 화강석을 사용해, 조선호텔을 지은 아오미 하지메가 시공했다. 근대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지어진 서울역은 서울의 대표 건축물이기도 하다. 2004년 1월 KTX 개통에 맞춰 현재의 신역사가 완공됨으로써 옛 서울역사는 철도 박물관이 돼 서울역의 역사성을 전하고 있다.

일제는 군사적 목적과 식량을 포함한 물자의 약탈을 위해 조선에 신속하게 철도를 건설했던 것인데, 먼저 1899년 경인선을, 1905년 경부선을 건설하는 순서로 약탈의 기간시설을 늘렸다. “힘 깨나 쓰는 장정 철도 역부로 끌려가고 얼굴 반반한 계집 갈보로 끌려간다”는 노랫말이 있듯이, 수많은 조선인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경부선의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서울역. 주변에는 남대문과 남대문 시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지척에 남산이 타워를 우뚝 세운 채 서울역을 바라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 고향 가는 열차를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제국의 철도역, 근대 수용의 공간
만들어진 근대, 제국의 철도역 서울역을 거쳐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가 일본 가는 배를 탔다. 영친왕과 덕혜옹주 등 조선 황실 가족, 김활란, 박인덕, 홍난파, 최승희 등 근대 지식인들의 유학과 귀국, 일제 총독 관리들의 부임과 이임 등이 이 서울역을 거쳐 이뤄졌다. 살 길이 막막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서울역을 거쳐 만주로 갔다. 머리를 짧게 자른 이른바 ‘毛斷’(modern) 보이, ‘모단’ 걸이 드나들며 근대와 낭만을 누린 곳도 이 서울역 주변이었다.

 

▲ 1945년 을유해방을 맞아 서울역 앞에 쏟아져 나온 인파
 1950년대 한국전쟁의 폐허와 1960대의 ‘보릿고개’로 불리는 식량난과, 1970년대까지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사람들의 마음을 서울로 향하게 했다. 지금도 가끔 발견되는 ‘근대화’라는 가게 이름이 짐작하게 해주듯 빨리 근대성을 이뤄 풍족한 물질문명 속에 사는 일이란 참으로 급선무이자 바람이었다. 1970년대초 경제개발 계획 속에 ‘1천불 소득, 100억불 수출’을 목표로 하는 슬로건도 단적으로 그 같은 여망을 말해주며 열악한 경제여건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그렇게 궁핍한 생활 여건과 경제 상황에서 이른바 ‘시골’은 서울에 비해 여러 면에서 더욱 열악한 곳이었다. 서울 가면 무언가를 통해 운명과도 같은 가난을 바꾸고, 더 많이 공부하여 고시에 ‘파스’(pass)도 하고, 출세할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을 한 사람들 모두 이 서울역을 통해 상경했다. 가족이나 고향 사람들을 따라 자신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사람들이 거쳐 간 곳이 바로 서울역이다. 1960, 70년대 부산으로 돈 벌러 가는 지방 사람들도 많았으나,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후에도 여전히 여객들은 서울역을 거쳐 가고 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어렴풋한 한국인의 관념이 서울역을 거쳐 성취됐는지도 모른다. ‘돈’ 벌기 위해, 보다 많이 배우기 위해, 사회적 위치를 개선하기 위해, 어려운 여건을 참아 내며 ‘고향’을 소재로 하는 노래에 지친 심신을 달래며, 이른바 베이비부머, 공순이, 공돌이로 표상되는 근대화의 역군들은 서울역을 거쳐 자신들의 삶의 터를 닦아 나갔다.

근대성의 속도와 시간 전쟁
‘만원’이나 ‘공화국’으로 은유되는 서울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역, 근대성의 메커니즘 성취를 위해, 그야말로 빠르게 달려왔다. 완행열차,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에 때로는 사람 사이의 낭만적인 ‘스토리’도 함께 실어 나른 여정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청량리역, 성북역, 왕십리역, 신촌역을 부심으로 해 우리나라 교통의 요충으로서 전국의 화물을 서울과 지방에 왕래시키고 인적 자원을 소통시킴으로써 도심의 역할을 꾸준히 하고 있는 서울역은 문을 연 지 110여년이 지난 만큼, 역사성을 쌓고 있다.

시속 300킬로미터 전후를 주파하는 KTX의 등장으로 서울역은 부산에서 근무하거나 비즈니스에 임하려는 사람까지도 수용하는 공간이 됐다. 통일호, 비둘기호 할 것 없이 완행열차에서 무궁화 열차로, 그리고 새마을 열차로, KTX로 대표되는 속도의 진화는 시간 절약과 효율을 쫓는 근대성이 이미 넉넉히 시현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전철 1, 4호선(지하 서울역)이 교차하고 인천공항철도가 가세해 사람들을 해외로 보내기도 한다. 이른바 1980년대 이후로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근대성의 속도와 시간 전쟁도 모자라는 듯 ‘보다 더 빨리’ 사람들의 장소 이동을 부추기는 곳이 됐다. 일제, 근대문명 이행기, 그리고 이즈음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런 문명적 과정에서 서울역은 이별과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민주화 운동의 장소로서 ‘광장’을 생성해 왔다.

1956년 5월 대통령 3선에 도전한 이승만에 맞선 민주국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연설을 듣기 위해 한강 백사장에 몰려 든 30만 인파가 거쳐 간 곳이거니와 1980년대엔 시청과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수용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노숙자라 부르는, 집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기도 한, 서울역은 근대 공간의 한계와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공간적 특성을 지닌 서울역은 오늘도 무작정 승차 시각을 알리며 경향 각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흡입하고 있다.

 

이명수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를 했다. 「동아시아 사유에 나타난 로컬리티의 존재와 탈근대성」 등의 논문과, 『담사동-소통과 평등을 사유한 사상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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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혁 2018-04-10 14:53:23
기차역 사진좀 가지고 가겠습니다 출처 남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