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眼光은 紙背를 徹하는가?
眼光은 紙背를 徹하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12.12.2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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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일본 속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는 말이 있다. 훌륭한 이해력이 종이의 앞면을 꿰뚫고 그 뒷면의 내용까지 알아차릴 수 있는 뛰어난 시력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말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라면 어떨까. 우리의 지각 능력은 너무도 빈약해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반대로 절대 안광이 지배를 철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편지를 봉투에 넣어서 보내면서 내용이 알려질까 걱정하지 않는 이유다. 또한 공항 검색대가 엑스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는 이유이고, 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장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시각은 얇은 종이 한 장의 뒷면, 얇은 피부 한 겹 아래조차 뚫지 못한다.

열려 있는 미래, 닫혀 있는 과거

이러한 시각으로 미래를 투사하고자 할 때, 번번이 오류로 귀결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래학 이라는 낱말이 학문으로 대접을 못 받는 것도 이런 상황과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신비한 직관력을 강조하려는 이들은 어떻게든 이것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점성술은 천체의 관찰 내용의 차이를 중심으로, 동양의 『주역』은 음양을 나타내는 기호들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수비학은 일련의 숫자들 사이의 신비한 내적 연관에 의해서 그렇게 한다. 모두들 객관적인 증거가 어딘 가에 있다는 듯이 행동하지만 늘 결과는 부정적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 우리가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할 통찰이란 미래는 열려 있고, 과거는 닫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순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개념으로 포착되는 짧은 어떤 지점일 뿐이다. 판단은 여기에서 불충분한 참고 자료들에 쌓인 채로 일어난다는 것만이 사실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현재 나의 판단이 미래의 나에 의해 재평가될 확률은 언제나 상존한다. 이 가능성은 어째서 우리가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는지,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어째서 과거의 기억들은 점점 아름다운 것으로 변해가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어떤 기억은 폐기되고, 어떤 기억은 재조정된다.

어떤 선택은 부정되고 어떤 선택과 결과는 기억이 강화된다. 사람들이 종종 그 중요성을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잊기도 한다는 것이다. ‘폐기학습’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새로운 사회화에 필요한 학습을 위해 기존에 존재하는 개인들의 인지적, 혹은 감정적 구조들을 파괴하는 것이 주된 특징을 이룬다. 습관이나 망각 때문이 아니라 진부한 의미구조를 해체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의미구조를 우리의 마음속에 건설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존의 것이 폐기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인간이 수면 상태에 있을 때 이뤄지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수면을 가정하지 않고도 이러한 폐기학습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저녁나절에 일기를 쓸 때, 일요일에 한 번 교회에 들러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그렇게 한다. 성당에 오랜 만에 들러 고해성사를 할 때도, 반복적인 주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기에도 그렇게 한다. 특히,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한 해의 경험과 그 경험에 의해 축적된 것들을 다음 해의 활동을 위해 다시 정돈한다.

이러한 재정돈 과정에 폐기학습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적절한 폐기는 쓸모없는 기억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다. 1년의 개인적 경험도 마찬가지이지만, 사회 전체의 공동체적 경험도 마찬가지다. 선택적 폐기와 기억의 강화를 통한 의미구조의 변화는 사유와 행위의 변화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이러한 의미구조의 변환 가능성과 인간 정신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는 정신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

진지한 폐기학습의 실행
자신의 1년에 대해 어떤 의견을 선택하고, 폐기와 기억 및 윤색을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는 각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한나 아렌트는 한 독일인이 어째서 ‘악의 평범성’을 대변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미 언급했었다. 그의 특징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협소한 의미구조의 고집이 커다란 사회적 악의 기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결국, 안광이 지배를 철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가지는 의미구조는 그리 완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의미구조의 불완전성에 대한 소박한 인정과 함께 진지한 폐기학습의 의도적 실행일지도 모른다. 나는 칸트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이 필요한 것이라고 했을 때 같은 인식을 진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성과 비판이 태양력을 사용하는 한 해의 주기가 저무는 시기가 되면 다시 주요한 낱말이 돼 반복해서 돌아오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이향준 전남대 BK21박사후연구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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