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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과연 동방의 불빛이었나?
조선은 과연 동방의 불빛이었나?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12.17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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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 대진대 교수, 1920년대 타고르 시 번역에 의문 제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동양인’이자 인도의시성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한국인들 에게 특히나 친숙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에게 써 줬다는 메시지가 그 이유이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 /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암울한 시기의 조선 민중들에게 감동이 됐던 타고르의 이 메시지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한 주인공은 흥은택 대진대 교수(영어영문학). 당시 <동아일보>의 자료를 근거로 제시한 홍 교수는“1929년 4월 3일자 <동아일보> 2면에 영어로 된 타고르의 육필 사진과 타이핑된 6줄의 원문이 실렸다”라고 말하며“‘타고르가 준 4행의 시’운운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번역자 주요한이 번역의 편의성과 가독성을 위해 6행을 4행으로 고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근거로 제시한 원문을 보자.

“In the golden age of Asia /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 and that lamp is waiting / to be lighted once again / for the illumination / in the East."

홍 교수는 이태로 당시 <동아일보> 도쿄지국장이, 조선 방문이 어렵다고 거절한 타고르에게서 직접 이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 것도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근거로 주요한의 문집『새벽 I』에서“동아일보사에서는 이태로 동경지국장에게 초청강연회를 교섭시켰는데 여의치 못해 동경의 한국 YMCA 총무인 최승만이 미국인 선교사 내슈를 통해 찬드라 보스에게 그 뜻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만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마도 일본 측의 농간이 있어 타골은 강연회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요꼬하마를 떠나면서 타골은 미국인 비서를 통해 강연회 못지 않은 선물-한편의 시를 한국인에게 보낸 것이다. 이 시가「동방의 등촉」이었던 것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을 제시했다.

여기까지는 사실의 왜곡이라기보다는 잘못 알려진 것이었지만 홍 교수는“제목도 없었던 4행, 아니 6행의 메시지 혹은 짧은 시에「기탄잘리 35」의 11행을 덧붙인 짜깁기본이 출현한 것은 진실의 명백한 왜곡”이라고 말하며, “출처도 명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로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실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하다”라고 우려감을 표현했다. 짜깁기 된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 지식은 자유롭고 /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하아는 곳 / 끊임없는 노력의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 지성의 맑은 흐름이 /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기탄잘리 35」의 원문과 이를 번역한 박희진의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Into the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저 자유의 천계에로, 주여, 이 나라를 깨우쳐 주옵소서”

홍 교수는“‘나의 마음의 조국’은‘my country'의 의역으로 볼 수 있지만, 원문에 있지도 않은‘코리아’를 삽입한 것은 명백한 왜곡이다”라고 말하며, “앞의 4행과 전혀 별개의 시를 한 데 붙여 한 편의 시로 짜깁기를 하고 더구나 원문에 없는‘코리아’를 넣어서 마치 타고르가 한국을 위해 지은 시인 것처럼 각색을 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잘못”이라고 말했다.

육당 최남선이 타고르에게 청해 받았다고 알려진 「패자의 노래」에 대해서도 홍 교수는 실제로 타고르에게 원고를 청탁한 이가 진학문이며, 이 시가 진학문이 청탁해서 새로 써 준 시가 아니라 이미 발표된 시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진학문이 원고를 받은 시점이 최소한 1916년 7월 중순 이후가돼야하는데,「 패자의노래」는1916년1월에시집 『과일 따기』(Fruit Gathering)의 85번째 시로 출판됐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실제로 타고르는 중국을 두 번, 일본을 세 번 방문했지만 한국은 방문한 적이 없다. 홍 교수가 논문에서 살펴 본 바로는, 타고르와 한국의 접촉은 그가 보낸 두 편의 시와 한국의 강연 방문을 요청 받았으나 좌절된 것이 전부다. 두 편의 시도 자발적이라기보다는 「패자의 노래」는 진학문의 요청에 의해 이미 출판된 시집에서 한 편을 보내준 것이고,「 동방의 등불」은 강연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메모 형식으로 건네준 것이다.

한편 홍 교수의 지적에 대해 근대 서지학 전문가인 오영식 보성고 교사는“「패자의 노래」와 타고르의 일본 기행 소개가 6쪽이 넘는 특집으로 실린 <청춘> 11호 영인본(1917년 11월 발행)을 보면, 「패자의 노래」해설 부분에‘1916년 시인이 일본에 내유했을 때 특별한 뜻으로 우리 청춘을 위하야 지어보내신 것이니, 인도와 우리와의 2천년 이래 옛정을 두텁게 하고…’라고 쓰여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 잡지에 진학문을 비롯한 여러 한국인이 타고르와 찍은 사진도 실려 있다고 말하며 타고르와 조선의 인연으로 봤을 때 너무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지, 당시의 번역본들을 일차적으로 검토해 볼 것을 주문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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