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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정선’ 신화를 걷어내다
‘솔거·정선’ 신화를 걷어내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12.17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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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한국 미술사 연구』 안휘준 지음┃사회평론┃800쪽┃35,000원

『한국 미술사 연구』가 흥미로운 것은 미술사학에 맹진해온 저자가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국 미술사학의 ‘미개척 분야’가 그것이다. 작품조차 남아 있지 않은 솔거를 한국 회화사의 3대가 중 한 명으로 지목하고, 겸재 정선을 기존 평가의 숲에서 끌어내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다. 저자에 따르면, 솔거는 8세기 중엽에 활동한 서예가 김생과 쌍벽을 이룬 전채서 화원이었다. 물론 잠정적인 결론이다. 이 부분은 역사 연구가 결국 상상력에서 출발한다는 ‘기본’을 환기한다. 그렇지만 그는 상상력에서 출발하지만 실증의 칼을 놓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상상력을 내세운 것은, 합리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런 식으로, 또 저런 식으로 생각을 굴려보는 일이, “그것이 1세대 연구자로서 짊어져야 할 책무”라는 인식에서다.

역사문헌과 대조해 솔거에게 시민권 부여
저자는 『삼국사기』의 「열전」, 「동사유고」, 『지봉유설』, 「백률사중수기」 등 여러 문헌기록을 대조하며 솔거의 신분과 활동연대, 화풍을 복원해나간다. 이렇게 해서 그가 읽어낸 솔거의 국적, 신분, 활동연대, 화풍은 무엇일까. 그는 중국 唐人 장승요가 신라에 와서 이름을 솔거로 바꿨다는 「백률사주승기」가 ‘황당무계’하고 사실무근임을 지적하면서, 양주동의 솔거 해석을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물론 “이러한 언어학적 풀이가 온당한지는 확단하기가 어려우나 신라적인 이름이라는 점에서는 공감이 간다”는 덧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문헌학적 기록과 관련된 논의를 두루 읽어내면서 ‘유령’ 솔거에게 시민권을 발부한 셈이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솔거는 일반 회화와 불교회화를 모두 잘 그렸다. 황룡사에 노송도, 분황사에 관음상, 진주 단속사에 유마상을 그렸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솔거는 산수화와 인물화를 겸장했는데, 산수화는 채색화로서 청록산수풍이었다. 李思訓·李昭道 부자의 화풍과 유관했을 것이다. 한편 인물화는 산수화와 달리 8세기의 중국 당나라 시대의 오도자 화풍과 관계가 깊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정선 역시 솔거와 마찬가지로 신분이나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이다. 또한 그의 특색 있는 화풍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만큼 겸재 정선은 논쟁적인 인물인 셈이다.

그런 논쟁적인 인물이 1970년대 이래, 더 올라간다면 해방 전후 무렵부터 어떤 이유에서 ‘민족화가’로 굳어지게 된 것일까. 안 교수는 이러한 시각의 응고화를 “정선을 그렇게 보려고 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그 중심에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연구실장이 있다. 정선이 조선성리학을 회화적으로 계승했다는 관점은 정선이 그런 사상적 체화가 가능한 사대부 화가였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안 교수는 새로운 논거들을 제시한다. 예컨대 장진성을 비롯한 신진학자들에 의해 정선이 조선성리학이라는 사상의 발현으로서가 아니라 사고팔 수 있는 물건으로 그림을 그리고 ‘몽당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로’ 濫作을 했다는 사실, 또 김조순의 『풍고집』 등 여러 기록에 정선이 도화서의 화원이었다는 언급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대해서도 가치 부여가 아닌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했다. ‘진경’을 ‘진정한 우리 국토의 모습’이 아니라 ‘남종화법을 가미해 그린 실경산수화’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화풍을 바탕에 둔 ‘개념’으로 진경산수화에 다가간 그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경치를 그린 그림을 ‘실경산수화’라고 부로되 남종화법을 가미해 그린 실경산수화는 별도로 ‘진경산수화’로 칭하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이어서 그는 진경산수화가 조선성리학의 회화적 표현이라는 최완수의 주장에 다시 이의를 제기한다. 출발점은 ‘사상과 회화의 관련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연구방법론적인 측면이다. 안 교수는 조선성리학 사상(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영역)이 실질적으로 화풍(그림은 정신 혹은 내면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술과 물리적 행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의 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질문을 던지면서 정선의 진경산수화 창출과 성리학은 별무관계였음을 정리해낸다.


겸재 진경산수화는 독자적 산물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의 창출은 전적으로 정선 자신이 자신의 조형의지, 창의성, 화법의 선택, 自己化 등을 통해 스스로 이뤄낸 업적이다. 그가 가까이 지낸 안동김씨 일문이나 주변 문사들의 소중화사상과 조선성리학만의 덕택이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잘라 말하는 저자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조선성리학과 조선소중화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막연한 당위론적 가설이나 짜맞추기식 이론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얘기”라고 반박한다.

예컨대 안동김문의 김창집이나 김창흡은 물론, 이병연이나 이하곤 등 미술을 좋아했던 주변의 인물들 중 누구도 진경산수화풍의 창출을 위해 정선에게 세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정선과 더불어 수십 년간 함께 어울렸던 같은 집단의 조영석이 그린 산수화에서는 어째서 진경산수화의 기미조차도 엿보이지 않느냐고 날카롭게 반문한다. 책의 말미에 수록된 ‘미술사 저술의 몇 가지 근본 문제’에서 저자는 후학들에게 이렇게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학문 인구와 전공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약간의 갈등과 분파 행위가 학교별, 분야별, 세대별로 생겨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경계할 일이다. 건전한 미술사 전공자라면 학교, 분야, 세대의 구별 없이 동지임을 잊지 말고 서로 아끼고 상부상조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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