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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의 근간 무대 … 空洞化된 공간은 무엇을 지워버리고 있을까
항일 무장투쟁의 근간 무대 … 空洞化된 공간은 무엇을 지워버리고 있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12.12.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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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14> 만주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국외 독립운동과 독립군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여러 세력들이 그 적임지로 선택한 곳은 한반도와 인접해 있는 중국의 만주(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일대를 통칭) 지역이었다. 특히 서북간도 일대는 압록강이나 두만강만 건너면 한반도에 쉽게 진입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이미 수십만에 달하는 한인사회가 형성돼 있어 인적, 물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수월했다.

항일의 지리적 조건들
정서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만주는 고구려와 발해 등 민족국가 발생과 민족문화 형성의 공간으로 옛 한민족의 활동지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1905년을 전후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베리아 지방까지 영향을 미친 제1차 러시아혁명의 물결과 1911년에 발생한 신해혁명 전후의 중국 사상의 조류가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동조 내지 후원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도 만주 지역에서 국외독립운동과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같은 조건을 바탕으로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항일전에서 살아남은 의병과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하면서 그 곳을 한민족의 부흥기지로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회영 등 신민회 인사들이 서간도 유하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청산리대첩과 만주사변 이후의 항일투쟁,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활약하게 될 졸업생들을 배출하는 등 민족진영 항일 무장투쟁의 근간이 됐다.

확장 혹은 축소된 만주의 기억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는 연길이다. 원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이 도시는 러일전쟁 이후 연변지구를 장악한 일제가 군사거점도시로 건설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연길에 있는 延邊烈士陵園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혁명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 했던 조선인들의 고충을 웅변하듯 보여준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조선의 해방을 염원하는 조선인이기에 앞서 중국의 해방을 위하는 소수민족으로서 중국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조선족이 자치권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에서 바쳤던 막대한 민족적 희생과 공헌 덕분이었다. 엄청난 수의 열사들은 바로 중국혁명과 조선해방의 경계에서 희생당해야만 했다. 만주는 역사적으로 다층적인 공간인데, 연길은 조선ㆍ중국ㆍ일제 사이에 뒤엉켜 있는 복잡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만주’가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에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투쟁의 근원지이자 동시에 싸우면서 나라의 동량을 키워내는 작업이 이곳에 움터났기 때문이다. 명동학교(맨위), 윤동주 생가(가운데), 그리고 대성중학교(왼쪽 아래)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만약 한민족 독립투쟁의 역사를 짙게 기억하고 있는 용정이 자치주의 주도가 됐다면 연변 조선족의 정체성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만주에 대한 기억은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된 간도, 항일운동의 공간, 이주지로서의 만주, 한민족 탄생의 공간 등으로 확대 혹은 축소되면서 복원돼 왔다. 그리고 만주와 간도라는 고유명사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한국과 중국은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만주, 간도에 대해 각기 다른 인식을 갖고 있다. 17세기부터 20세기 이전까지 중국에서 만주는 만주족과 그 거주지를 가리켰다.

당시 만주는 지리적으로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내몽고 동북부 지역을 포함했다. 현재 중국은 이 지역을 동북 3성으로 부르면서 만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만주라는 단어는 일제의 식민지였던 滿洲國(1932~1945)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국의 만주가 포함하는 지역은 동북 3성과 내몽고 동부에다 熱河省(지금의 河北省의 承德지역)이다. 한국, 북한, 일본과 러시아 등 만주 주변의 국가들도 만주라는 지리적 명칭을 사용하지만 그 내포적 의미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間島 혹은 墾島라는 고유명사도 사용하지 않는다. 間島의 원래 명칭은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 새로 개간한 땅이라는 의미에서 墾島다. 1909년, 일본은 청나라와 맺은 間島協約에서 조선인의 주권이 삭제된 間島를 사용하면서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청에 넘겼다. 그리고 일본의 만주국은 間島省을 설립하고(1934) 間島市(현재의 중국 길림성 연길시)를 성 중심도시로 삼았다.

만주공간에 대한 한국사회의 접근방식은 상상적이었다. 한국은
만주공간을 과거 부여와 고구려, 발해 같은 강건한 왕조국가에 대한
자기만족적 기억을 상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공간, 조선 독립투쟁의
흔적들을 집중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각했다.

만주국의 간도성은 현재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고 중국과 일본이 인식하는 간도의 범위도 이와 일치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중국의 동북 3성을 간도라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간도라는 명칭보다는 부여, 고구려, 발해를 만주라는 용어로 묶어내는데, 이는 중국의 동북 3성과 내몽고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합한 지역이다. 고유명사 만주와 간도는 사용되는 시기와 국가의 입장 차이로 인해 다층적인 단어가 됐다.

중국과 한국이 부여와 고구려, 발해라는 옛 왕조를 자신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노력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만주, 간도 그리고 그 용어를 둘러싸고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주권이 직간접으로 충돌하고 있다. 지금 만주는 급변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조선족들이 연길과 중국 동부연해지역 그리고 한국 등지로 밀물처럼 빠져나감에 따라, 연변의 조선족 농촌공동체는 급격히 붕괴되었다. 연길의 조선족 비율에는 큰 변화가 없는 반면, 용정 등 농촌의 조선족 인구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한국의 상상과 중국의 만주공간 재편
그 이유는 한국사회가 만주공간과 이곳의 조선족을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은 만주공간을 역사적 상상과 향수의 관점에서 접근했는데, 그것은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상상력이 이 공간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공간에 대한 한국사회의 접근방식은 상상적이었다. 한국은 만주공간을 과거 부여와 고구려, 발해 같은 비교적 강건한 왕조국가에 대한 자기만족적 기억을 상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공간, 조선 독립투쟁의 흔적들을 집중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각했다. 그리고 민족적 차원에서 신성한 산으로 인식되는 백두산과 묶이면서 만주공간은 성지순례의 관광경로에 포함됐다. 만주 일대에 산재한 역사 표상체들은 한국 관광객들이 소비하고자 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진정성을 부여했다.

항일유적지, 고구려와 발해지역 관광이라는 장소신화 관광은 역사의 정당성과 현대의 견고함으로 인식하는 계기로 활용됐다. 한국사회는 만주공간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상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기만을 원했다. 공간에서 조선족 거주민을 분리시킨 한국사회는 청도와 같은 중국 동부연해지역으로 그들을 이동시켰다. 만주공간은 조선족의 대거 이주로 인해 더욱더 공동화돼 갔다.

만주 일대의 공동화된 공간은 한족이 채워가고 있으며,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는 각종 계획을 추진하면서 만주 공간 전체를 실질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연길, 용정, 도문을 하나의 광역시로 통합하려는 延龍圖 계획, 장춘-길림-도문을 연계해 개발개방 선도지구로 조성하려는 長吉圖 계획은, 만주에 새겨져 있는 조선인 항일운동 기억의 삭제라는 부산물을 얻을 것이다.

 


박정희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전임연구원
필자는 중국 베이징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관심분야는 중국대중문화, 중국지역연구이다. 『중국 영화·문화·도시』, 『세계도시 베이징의 공간기억과 문화재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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