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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필름카메라’에 미쳐사는 이 사람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필름카메라’에 미쳐사는 이 사람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12.10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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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김종세 한국카메라박물관장

▲ 김종세 한국카메라박물관장은 대구 EXPO 이미징 아시아 조직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경기도박물관미술관협회장, 한국클래식카메라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10년이 넘도록 국내외 다락논을 찍어 사진전을 열고 있다.

 

1976년, 돈을 벌어 처음으로 카메라를 샀던 젊은이는 한 번 산 카메라는 되팔지 않았다. 명기라는 소문이 들려오면, 카메라뿐만 아니라 교환렌즈들까지 사 모았다. 이렇게 30년 동안 모은 카메라들은, 국내 최초이자 개인 소장 규모로 세계 최고의 카메라박물관이 됐다. 한국카메라박물관을 설립한 김종세 관장(62세)의 이야기다. 일회성의 상징 디지털카메라가 대세인 오늘도 여전히 필름카메라를 고집하고 있는 김 관장을 만났다.

△카메라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중학생 때, 집 옆에 사진관이 있어서 관심 있었고, 소풍갈 때 카메라 빌려 쓰던 기억들이 있어요. 그러다 1976년에 처음 내 돈으로 카메라를 샀죠. 성격 탓인지, 내 손에 들어오면 다시 팔지 않게 된 게 여기까지 왔네요.

△어떤 이유로 카메라박물관까지 지었나.
기계적인 메커니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렌즈 때문입니다. 각 회사마다 렌즈의 특성이 다르니까, 이 렌즈는 어떨까, 저 렌즈는…하는 욕심이 생기다보니, 모일 수밖에 없더라고요. 우리 박물관에 카메라도 많지만, 렌즈는 그 두 배정도 될 거에요. 어떤 카메라가 세계적으로 명기라고 하면, 그 카메라가 만들어졌을 때, 교환렌즈들은 거의 구했죠. 그냥 카메라 변천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면, 바디에 표준렌즈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저는 그런 방법이 아닌 거죠.

△박물관을 짓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가 되면, 뭔가 사회에 기여를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했던 것 같나요. 처음에는 광고업을 했는데, 그 부분에서 후배들에게 뭔가를 남겨야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한 거죠. 당시 태국에도 있는 카메라박물관이 우리나라엔 없었으니까, 우리나라도 이제 카메라박물관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993년부터 실질적으로 카메라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이전에는 카메라를 쓰기 위해서 구입했고, 구입한 것은 사용해서 특성을 느껴 봤는데, 93년 이후부터는 카메라 박물관에 필요로 하는 양적·질적·역사적인 카메라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수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카메라를 구입할 때, 환금성을 중시해요. 궁할 때 팔면 밑지지 않을 것 사는 게 당연한 거죠. 그랬던 저도, 1993년부터는 환금성 없더라도 카메라 발전사에 중요한 카메라들, 희소성 있는 비싼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2002넌 문광부에 등록했고, 2004년 서울세계박물관대회에 맞춰 6월 15일 유료로 정식 개관했다.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나.
정부에서 2004년부터 복권기금으로 연간 2천~3천만 원 정도를 지원했어요. 생동감이 있었죠. 특별전시회를 하면서 도록도 발간했습니다. 지원해주는 만큼의 기간 동안은 무료 관람하라는 조건이 있었으니까, 최종적으로는 관람객이 수혜를 입은 거겠네요. 지금은 학예사나 에듀케이터의 인건비의 일부를 정부에서 지원해 줍니다. 오히려 경기도나 시에서 지원이 있어요. 둘이 경비를 부담해서 전시, 학예인력, 교육체험을 후원하는 방식이죠. 갈등도 많았어요. 주변 사람들도 다 말렸고…. 카메라라는 기계가 습도, 온도에 민감하니 매달 운영비만 해도 엄청나고, 초창기 카메라들은 시기마다 손질하려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사진 찍으러 다닐 개인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해졌고요.

△박물관 짓고 바뀐 점이 있다면.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카메라가 어지간한 가정의 가보 1호였단 말이죠. 그런데 그 카메라들을 점진적으로 모으다 보니까, 처음에는 안방 한 편을 차지하던 게 거실로 나가게 됐고, 그것도 안 되니까, 방 한 칸에 잘 보관을 했는데, 이게 심각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콜렉터는 대부분 자신의 주소를 숨기죠. 소장품을 도난당할 위험이 항상 있으니까요. 그러다 나중에는 아 이거 위험하다. 물건은 없어지더라도 사람이 해를 당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집에는 카메라를 안 두고, 한 건물 다른 층에 카메라를 보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맘먹고 문광부에 등록하니 생각이 싹 달라졌어요. 남들한테 오픈한다는 생각에서는 내 개인재산이 아닌 오픈, 공유의 개념이 됐어요. 그때부터는 아주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개관하고 지금까지 CCTV는 있지만 세콤을 안 했습니다. 이젠 관리만 내가 하지, 이 소장품들은 모두와 공유하는 물건이라고 마음이 바뀌더라고요.

△모두 다 기억에 남겠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수집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만들고 영국에서 판매한 1938년 콤파스라는 카메라에요. 책에서 보고 2년 정도 찾아다니다가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매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4천~5천 대 정도 생산됐는데요, 크기가 담뱃갑 2/3에요. 그 안에 모든 기능들이 함축돼 있는 거죠. 게다가 스위스에서 만들었으니, 아주 정교하기까지 했어요. 몸살 날 정도로 구하고 싶던 카메라였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목재 카메라인데, 크리스티 경매에서 중동에서 전화로 경매한 사람 때문에 못 샀던 카메라가 있어요. 낙담하고 있었는데, 남아공에서 더 깨끗하고 가격도 낮은 카메라가 한 세트로 나와서 구매했어요. 행운이었죠.

△한국과 관련된 카메라도 있나?
1930년대 정도일겁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목재카메라가 있었어요. 필름 크기 자체가 30cm가 넘을 정도로 큰 카메라였지만 상당히 잘 만든 맵시였죠. 그 다음으로는 1970년대 대한광학에서 일본 부품을 들여와 만든 카메라가 있어요. 국내 자체적인 기술로 만든 건 1976년 코비카가 처음이죠. 역시 대한광학이 만들었는데, 12~13대 정도 만들고 1983년에 문을 닫았어요. 1980년 이후부터는 대기업이 일본과 제휴해서 조립생산 시작했죠. 현대는 올림푸스, 삼성은 미놀타, 아남정밀이 니콘이랑. 지금은 삼성만 카메라를 생산하고 있죠.

△카메라를 구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인터넷이 발달되기 전에는 외국에 있는 친구, 지인들에게 자료 받아서 이걸 구입해서 보내달라든지, 직접 외국 나가서 샵마다 돌아다니면서 구입해서 갖고 왔어요. 재미난 건, 어디든지 못사는 나라보다는 잘 사는 나라에서 물건다운 게 나온다는 거예요. 영국 연방국가 사람이 이민을 갔다던가, 독일 패망 이후에 나름 유력한 인사들이 아르헨티나 쪽으로 많이 이주를 했었거든요. 그런 쪽에서 귀한 것들이 나오는 것이죠. 주로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영국, 독일, 미국, 이런 쪽에서 많이 구했어요. 물론 일본은 얘기할 것도 없고. 거긴 정말 콜렉터들이 많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기획전은?
‘라이카 카메라 특별전’이나 ‘라이카 모방카메라 특별전’등 많죠. 박물관이 2007년 9월 12일에 이전개관을 했습니다. 그 기념으로, 초소형 카메라와 스파이 카메라 특별전을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시계모양부터 반지, 핸드백, 단추모양의 카메라 등등 스파이용으로 사용했던 것 뿐 아니라, 영화에도 많이 나왔던 초소형 카메라들로 전시를 했는데요.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기획전이 됐더라고요.


△앞으로 구상하는 기획전이 있다면.
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조립생산을 했었던 카메라들을 전시하고 싶어요. 국산카메라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삼성, 현대, 골드스타 마크 가 붙은 카메라를 전시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1840년대서부터 1970년대까지 만들어진 목재카메라 특별전을 기획하고 있어요. 1920년대까지는 아주 예쁜 목제카메라들이 많거든요.


△지금 쓰는 카메라와 렌즈는?
바디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렌즈는 1950년 초반에 독일 포이트랜더사에서 만든 아포란타를 씁니다. 그 많은 렌즈를 써 봤지만, 색재현율부터 이게 내 감성에 제일 맞더라고요. 그걸로 10년 째, 다랭이논(계단식 논)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2002년에 다랑이 논을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개인전을 열었죠. 6~7년 전부터는 중국에서 촬영을 하고 있어요. 올해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해서, 중국 홍토지역을 촬영한 ‘붉은 다락밭’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이 국내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
금속 또는 광학 쪽 사람들에게 정보 제공을 해준 것들이 있다고 봐요. 물론 박물관의 본연의 임무는 지키면서 말이죠. 그게 박물관을 설립한 동기니까요. 상당부분은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기여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2~3년 전부터 삼성전자 디자인팀이라던가 카메라 시스템 작업을 하는 곳에서 일 년에 한두 번 옵니다. 국내 카메라 제조업체들이 와서 보고 가는 걸 보면, 아, 내가 뭔가를 제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어린애들한테 볼거리 제공은 당연한 거고요.

△디지털 시대다. 스마트폰, 똑딱이, DSLR이 지배하는 카메라 시장과 세태를 어떻게 보나.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제 소장품들을 가치 평가해보면, 40%정도는 감가가 됐을 거예요. 희소성 있는 거 빼더라도요. 그렇지만, 아날로그 시대, 즉, 필름과 아날로그 카메라가 사라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매우 적은 숫자가 살아남겠지만요. 점진적으로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귀족화 될 것 같아요. 편리하게 사용하는 쪽은 디지털로, 많이 고민하는 쪽은 아날로그를 고집하겠죠. 필름 값, 인화비 모두 비싸질 테니 귀족화가 된다는 것이죠.

△김종세 관장에게 카메라란?
원수 덩어리에요.(웃음) 주변 사람들이 그래요. 이제 편하게 살면 되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요. 그런 얘기 들으면 정말 원수덩어리 같아요.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에게 뭔가 기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먹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나마 남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카메라 닮은 박물관 건물, 특이한 카메라 수두룩

▲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생산된 Contax ll Rifle
지하철 4호선 과천 서울대공원역 4번출구로 나오면, 특이한 디자인의 한국카메라박물관이 보인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박물관 건물은 카메라의 바디를, 전면의 중앙 반원은 반으로 잘린 헥토르 렌즈(독일 라이츠사)를 본 떠 만든 것으로 무한한 우주를 촬영하려는 카메라의 단면을 형상화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독특한 외관만큼 신기하게 생긴 카메라들이 가득하다.

30년 간 김종세 관장이 수집한 카메라의 면면을 보면, 카메라의 원조인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 루시다부터 초기 폴라로이드 카메라, 항공용 카메라 등 3천대가 넘는 카메라와 6천개가 넘는 렌즈가 있다. 유리원판 필름, 초기 환등기, 인화기, 각종 악세사리까지 합하면 1만5천점이 넘는다. 한 번에 전시가 불가능하기에, 1층 특별전시실에서는 매년 순환전시를 하고 있다.

수많은 희귀 카메라 중에 단박에 눈을 사로잡는 카메라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짜이스 이콘사가 1936년에 생산한 ‘Contax II Rifle'이다. 이름처럼 총대 위에 부착된 방아쇠를 당기면 셔터가 동작되는 독특한 방식이다.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한 독일 베를린 올림픽의 촬영을 위해 4대만 생산됐다. 2대가 유실, 1대는 행방이 묘연해, 현재 한국카메라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15개의 렌즈가 있는 ‘증명사진용’ 카메라, 충분한 노출시간을 위해 30분 동안 포즈를 취하고 있어야 했던 1840년대 미국 사진관용 카메라 등 눈길을 끄는 카메라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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