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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그들을 불러오기 위하여
[만파식적] 그들을 불러오기 위하여
  • 교수신문
  • 승인 2002.08.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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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6 15:32:58
김윤선/고려대 강사·국문학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일 년 전 1학년 교양 수업에서 만난 학생으로부터의 편지였다. 그는 언젠가 강의 시간에 가방이 터지도록 과일을 가져와서는 고향집에서 온 과일이라면서 투박한 그대로 불쑥 내게 내밀었다. 덕분에 과일을 나눠 먹으며 수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강단에 선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대학 2학년의 한 학기를 보내고 1년만에 다시 보낸 편지에서 그 친구는 자신의 전공을 알려주었지만, 이미 전공과는 상관없이 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고시 공부가 쉽지 않아도 학교에 있을 때보다 즐겁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무엇이 이 친구를 학교에서 벗어나 고시촌으로 가게 했던 것일까.
나의 학창 시절로 기억의 흔적을 찾아가 본다. 그 시절의 나 역시 시간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끌려 다녔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기는커녕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한 고민들로 지쳐있었다. 독서는 하면 할수록 더욱 버거웠다. 서클 생활만이 그런 대로 학교 생활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그러던 중 편지를 보낸 학생처럼 2학년이 되었을 때, 전공 교수님들을 만났다. 물론 선생님들과 사적인 만남을 하지도 않았고, 선생님들 역시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식을 통한 만남이 있었다. 그분들은 학문과 삶에 대한 성실함과 그것을 위해 고민하고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선생님들이 공부하고 강의하는 모습을 내 삶의 표본으로 삼았다. 삶의 문제들, 사회 문제들 앞에서 보여주는 그분들의 선택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시대를 밝혀줄 수 있는, 지성인의 양심을 배웠다. 결국 그 시절 선생님들은 나를 다시 학교로 부른 이유가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떠나고 남아있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다. 더 이상 지식이 만남이 되지 못하고 수단이 돼버린 학교,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서 규율적 인간으로, 계량화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라면 학교 안에서 살아가든, 그곳에서 벗어나든 삶의 질은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선생님들이 나를 불러주었듯이 떠나가고 있는 그들을 부르고 싶다. 학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지식이 도구적 수단에 불과한 친구들을 학문하는 기쁨으로, 지식으로도 우정을 쌓을 수 있는 만남의 장으로 부르고 싶다. 이제 누가, 무엇이 그들을 다시 지식의 장으로 부를 수 있을까. 지식의 장이 있기는 있는 것인가.
다음 학기에도 학점 평가의 근거를 묻거나 학점을 올려달라는 메일이 넘쳐날 것이다. 배움의 고민과 단상들, 세계에 대한 회의와 방황의 사연들로 넘쳐나는 메일함, 더욱 의미 있는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활기찬 학교, 수동적인 복종의 행위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적응과정으로서의 교육, 외적으로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 뿐 아니라 내부로부터 삶의 길을 변형시킬 수 있는 학문은 이제 정말 대학에서 불가능한가. 권력에 기생하고 기성 사회에서의 특권층이 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지식, 새로운 양식의 주체를 스스로 구성해내는 지식, 그리고 각자가 서로 주체로 설 수 있는 지식의 교류는 불가능한가. 지식은 우리들에게 만남과 행복을 주지 못하는 낡은 유물에 지나지 않은가. 이런 질문들에 답을 찾으며 나는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향에서 가져온 과일이 아니라, 금의환향하듯이 백화점에서 사 온 화려한 과일 바구니가 아니라, 학문의 즐거움과 괴로움의 달고 쓴맛으로 맺어진 과일,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씨앗을 품은, 볼품없어 보일지라도 실한 과일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갑자기 불쑥 찾아온 그 과일 때문에 우리의 수업이 축제가 되는 날, 그런 날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때까지 나는 부끄러운 선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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