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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 조선인 노동자의 죽음에서 連帶를 꿈꾸다
징용 조선인 노동자의 죽음에서 連帶를 꿈꾸다
  • 김정훈 전남과학대·일본근대문학
  • 승인 2012.12.10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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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자료_ 마쓰다 도키코의『땅 밑의 사람들』에 대해

일본 작가 중 마쓰다 도키코(松田解子, 1905~2004) 만큼 일제강점기의 이국(조선인, 중국인)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평화와 민주주의 운동을 실천한 작가는 드물다. 그렇게 중요한 작가임에도 일반 독자층에는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다.

 

조선인 노동자 11명과 일본인 11명이 사망한 나나쓰다테 사건현장을 방문한 마쓰다 도키코의 현장사진. 그녀 옆으로 나나쓰다테 사건의 조혼비가 보인다.

 

마쓰다 도키코는 1928년 <독서신문>에『출산』이라는 단편으로 입선했다. 같은 해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에도 가입, <戰旗>에 시「갱내의 딸」을 발표했다. 현실참여 문학 여정의 돛을 올린 마쓰다는 1929년 <여인예술>에「젖을 팔다」를, 같은 해에「목욕탕사건」등을 발표하며 시, 수필, 평론 등 형식과 장르를 초월하는 활동을 펼쳤다.

노동자에 주목한 현실참여 문학

그녀가‘신일본문학회’에 가입, 본격적인 민주주의 문학운동을 전개한 것은 전후였다. 실천운동가의 모습으로‘마쓰카와 사건’에 관여했고, 그 재판의 불공정함을 지적,「 진실은 벽을 뚫고」라는 피고의 수기를 간행하기도 했다. 하나오카 사건과 중국인 노동자, 조선인 노동자 문제에도 눈을 돌려『땅 밑의 사람들』,『 유골을 보내며』,『 뼈』등의 작품과 르포를 통해 사건의 진상규명에 매진했으며 권력이 노동자를 탄압하는 현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고발했다.

열정적인 삶을 산 마쓰다에게 있어서 일생동안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오카 사건. 그녀는 진상규명에 착수, 사건의 실상을 세상에 고발하는 운동을 몸소 실천했음은 물론, 『땅 밑의 사람들』을 비롯, 여러 작품과 리포트, 르포 등을 통해 그 역사적 진실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땅 밑의 사람들』은, 2차 대전 말기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중국에서 일본 아키타현 하나오카 지역으로 연행당한 다수의 중국인 포로 이야기다. 전쟁물자 생산으로 강제 노역, 기아, 학대에 시달리던 중국인들이 봉기했지만, 전원 체포돼 학살당한 사건이 바로 하나오카 사건의 전말. 작가 마쓰다가 철저히 취재하고 조사해 르포소설로 발표했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조선인 징용자와 일본인 노동자가 생매장되는 나나쓰다테 사건의 배경, 다수의 중국인 포로가 하나오카 광산에 투입되는 상황, 그들이 봉기해 처형당하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전시동원으로 하나오카 광산에서 차별과 설움을 감내하며 노역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조선인 징용자들의애환과 고국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심경도 잘 묘사돼 있다. 마쓰다가『땅 밑의 사람들』에서 묘사하는 조선인 희생자 문제와 나나쓰다테 사건 배경, 실상을 들여다보자.

“태평양전쟁에 접어든 이후의 하나오카 갱부는 위험의 예언조차, 생명과 관계되는 위험의 예언조차 입에 올리는 것을 피했다. 갱부에게는 갱내가 전쟁터다.‘ 그런 생각으로 임해줘.’이게 반장이나 갱내 보안담당을 필두로 기수와 가장에 이르기까지 조석으로 내뱉는 훈계였다. 그 훈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기가 위험하다는 둥 여기가 어떻다는 둥 품과 시간이 든 내용을 주장하는 자는‘비국민’인 것이다.”(1장, 2)

안전이나 보호라는 언어는‘갱내’를‘전쟁터’라고 생각하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완전히 외면당하는 상태였고 오로지 ‘증산’이라는 두 문자만이 통용되고 있었다. 갱도함몰은 예상된 사건이었다. 발생할 만한 당연한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은‘나나쓰다테 갱 함몰’로 한일 노동자의 격렬하고 의미 깊은 연대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는 삽이나 곡괭이 등으로 붕괴된 곳을 파헤쳐 동료 강씨를 구출해내는데, 무모한 난굴을 명령한 일본 제국주의, 그리고 군과 가시마구미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연대한다. 하지만 마쓰다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감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노동자인 한, 광부인 한 생사를 같이 한다. 내 동생은 강씨보다 더 비참하게 죽은 게 아닐까? 일본인도 조선인도 중국인도 미국인도 노동자인 한, 자본가에게 묶여 군대에 끌려가는 한 싫든 좋든 총알받이가 될 뿐이다.”(3장, 9)

작가의 시점에는 계급과 신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노동자를 보는 공평한 시선이 투영돼 있다. 그러고 보니 작가 마쓰다는「하나오카 그 후」(<일중우호신문> 1972.11.30.)에서‘일본과 조선과 중국 노동자의 연 깊은 역사’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 노동자의 국제연대까지를 염두에 둔 생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나쓰다테 사건은 중국인 포로들을 하나오카 광산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다. 마쓰다는 그런 상황을“포로 296명이 일본 정부의 알선으로 최초로‘화북노공협회’의 손에서 그 광산의 댐이나 수로 공사를 담당하게 된 가시마구미에게로 넘어간 것은 1944년 7월. 그런데 약 2개월 전인 5월 29일, 난굴작업이 초래한 하나오카 강 침수로 함몰해 나나쓰다테 광산은 일본인 11명과 조선인 11명을 일거에 낙반으로 삼켰다”라고 증언했다.

소생하는 나나쓰다테 사건의 의미

또한 그녀는 수필「하나오카 사건과 나」에서“하나오카 광산에는 지금도 희생당한 포로들의 유골이 산과 들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도 아키타의 광산에서 출생한 만큼 몸을 찢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라고 고백했다. 마쓰다는 사건 발생 5년후인 1950년 하나오카 탐방조사에 착수, 1961년과 1972년에도 현장을 찾았다. 사건 진상을 폭로하고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집념 때문이었다.

하나오카 사건에 대해서는 진상규명 작업이 추진됐고, 중국인 연구자들에 의해 여러 각도에서 연구도 진행돼왔다. 그러나 그 모티브가 됐던 나나쓰다테 사건에 대해서는 유족이나 관계자 이외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2009년 5월 29일, 오다테市에서 처음으로 한일공동으로‘나나쓰다테 사건 65주년 추도식’이 열렸고‘하나오카 광산과 조선인 강제연행’이란 심포지엄도 개최됐다.

나나쓰다테 사건에서는 극단적 상황에 처한 한일빈민층이 공생을 위해 어떻게 화합하고 연대했으며 투쟁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 사건은 한일 미래와 평화공존을 위해서라도 철저히 규명될 필요가 있지만 더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등식 타파, 국적과 성별이 달라도 대등한 관계를 견지했고, 무엇보다 인간성 회복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마쓰다는 사건의 진실과 함께 이 의미를 작품에 새긴 것이다.

덧붙여 이 글은 <중앙평론> 281호(주오대학출판부, 2012.10)에 발표한 필자의 논문「마쓰다 도키코의 『땅 밑의 사람들』론」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가필, 번역한 것임을 밝혀둔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근대문학
필자는 일본 간사이가쿠인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소세키(漱石)와 조선』,『 소세키(漱石) 남성의 언사·여성의 처사』, 논문으로「마쓰다 도키코‘하나오카 사건 각서’고찰」등이 있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근대문학필자는 일본 간사이가쿠인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소세키(漱石)와 조선』,『 소세키(漱石) 남성의 언사·여성의 처사』, 논문으로「마쓰다 도키코‘하나오카 사건 각서’고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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