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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주례사비평을 넘어서』(김명인 외 지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刊)
[깊이읽기]『주례사비평을 넘어서』(김명인 외 지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刊)
  • 최성일 / 출판평론가
  • 승인 2002.08.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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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6 15:20:43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이 책을 속히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집을 통독한 게 대체 얼마 만의 일인가.

1996년 출판계에 발을 디딘 이후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비평집이 없는 것 같다. 요즘은 문학평론 한 편을 완독하는 것도 버겁다. 120호까지 정기구독이 돼 있는 ‘창작과비평’은 새 책이 배달되면 차례를 한번 쓱 훑어 보는 게 고작이다. 외려 ‘황해문화’, ‘인물과사상’, ‘비평과전망’에 실린 문학평론은 곧잘 읽곤 한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편을 읽으면 금새 싫증이 난다.

그래도 문학평론집은 꾸준히 사는 편이다. 젊은 평론가들의 책을 주로 구입하는데 소명출판의 ‘청년에세이’ 시리즈로 출간된 ‘민족문학을 넘어서’, ‘불을 찾아서’, ‘비평기계’ 등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 놨다. 또 ‘타는 혀’와 ‘역사의 천사’도 구입했다. 제목을 범상치 않게 짓는 것이 요즘 평론집의 추세로 보이나 너무 튀는 것은 좋지 않다.

‘놋쇠 하늘 아래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무덤 속의 마젤란’, ‘비루한 것의 카니발’ 같은 것은 서점의 서가에서 뽑혀져 판매대까지는 용케 갈 수 있어도 셈을 치르는 데는 주저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문학평론집 제목에 외국말을 끌어다 쓰는 것이 썩 유쾌하진 않다. 그럴 정도로 우리말의 목록이 남루하진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 이 책들을 서점의 서가에서 꺼낼 수 있을 지도 솔직히 의문이다. 교보문고·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의 인문코너에 보란 듯이 나란히 꽂혀 있던 문학평론집들의 대열이 어느 틈엔가 흐트려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교보·영풍 같은 서점에서는 운좋게 원하는 평론집을 구할 수 있지만, 그보다 규모가 작은 대형서점에서는 문학평론집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서점 관계자가 매장을 꾸밀 때 문학평론집을 더 이상 배려하지 않는 것은 평론집을 찾는 독자가 현저히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은 시와 소설에 비해 평론에서는 화제작이 없었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근자에도 화제를 모은 평론집이 있기는 하겠지만 문학판에서나 각광을 받았을 따름이지 문학장과 일정한 거리를 둔 독서 대중에게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내 기억에 남는 평론집도 10여 전 출간된 ‘희망의 문학’과 ‘비평의 매혹’ 정도다.
그러니까 ‘주례사비평을 넘어서’는 실로 10년 만의 화제작인 셈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실감이 그렇고, 출판역사적으로는 20년 만의 화제작이랄 수 있다. 이 책은 1980년대 초반 강제폐간된 ‘창작과비평’의 평론 영역을 대신한 ‘한국문학의 현단계’ 시리즈와 많이 닮았다.

우선, 문학의 숨통을 조이는 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작업이라는 점이 비슷하다. 문학을 죽이려는 권력의 성격이 폭압적인 정치 권력에서 은근한 문학 권력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개인 평론집이 아닌 점도 같은데 ‘주례사비평을 넘어서’의 필진은 20년 전에 견줘 뒤질 게 없다. 아니, 더 화려하다. 더욱이 이들이 비평하는 대상은 한국문학의 깃털이 아니라 몸통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직 반쪽짜리다. 이 책에서 개진된 비판에 대한 반비판이 제출될 때, 우리 문학과 비평은 활력을 얻을 것이다. 허나 낙관은 금물이다. 비판의 대상이 된 작가가 보여준 최초의 반응은 저윽이 실망스럽다. 최근 소설을 펴낸 신경숙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들이 주례사비평의 혜택을 받았다는 지적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는 쓰는데 충실할 뿐’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신경숙을 주례사비평의 수혜자로 지목한 김명인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작가의 의견표명이 있어야 한다. “작가란 누구나 말해질 수 없었던 것, 혹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말하는 사람이다. 이미 말해진 것을 말하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다.”

적어도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비평가인 황종연은 성실하게 응답해야 마땅하다. 달리 생각하면 황종연이 자주 언급된 것은 그가 당대의 명민한 비평가라는 방증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비평은 단지 화려한 지식의 경연장이 아니다”는 권성우의 지적에 대해 황종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니, 그에게는 응답의 의무마저 있다.

이 책에 실린 9편의 글 가운데 진중권의 글을 제외한 8편은 문학평론, 그것도 메타 비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8편의 평문이 공히 비평에 대한 비평을 행하고 있으나, 2편의 글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김진석과 신철하의 글에서는, 시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서겠지만, 실제비평도 이뤄지고 있다.

특히 김진석이 서정주 시인의 친일시와 탐미적 성향의 다른 작품을 겹쳐 읽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라 할 만한다. 한편, 내가 뛰어난 평론집으로 기억하는 ‘동시대의 시와 진실’의 저자가 미당의 맹목적 옹호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도, 씁쓸하지만, 알찬 수확이었다. 또한 김진석의 글은 문학평론 읽기의 긴장감을 다시금 맛보게 해주었다.

황지우 시인을 향한 상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신철하는 황지우 시인이 각광받은 요인으로 198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이를 절묘하게 형식화한 시인의 재기발랄을 꼽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비평과 매체”의 덕을 봤다고 말한다.

‘주례사비평을 넘어서’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낯설게하기 전략을 따르지 않은 데 있다. 본문과 인용문에서 발견되는 공연히 끌어다 쓴 생경한 낱말은 ‘불외하다’, ‘표사’, ‘기투’ 따위가 고작이다. 되려 아주 평범한 어휘 하나가 묘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서너 번은 족히 등장하는 ‘양심’은 이땅의 문학평론가들에게 헌법 제103조를 새겨 읽길 권하는 듯하다. 물론 헌법 조문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변조를 거쳐야 한다.

‘평론가는 자신의 세계관과 문학이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비평한다.’ 토를 달면 여기서 독립은 에콜·매체·여론·비평대상 등과의 거리두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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