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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흠의 후학들은 무엇으로 세상을 흔들었을까
유흠의 후학들은 무엇으로 세상을 흔들었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12.11.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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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고대 중국에서 문헌의 전승과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언급돼야 할 사람은 바로 孔子다. 공자는 “옛 것을 잘 익혀야 새 것을 알게 되고”(溫故知新), 자신은 옛날 것을 잘 전달할 뿐 마음대로 창작하지 않으며 “믿음을 가지고 옛 것을 좋아한다”(信而好古)고 말했다. 과거의 훌륭한 유산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논어』 전편에 걸쳐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다가온다. 공자의 시대는 물론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단계였다.

공자 또한 그 새로움에 대처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溫故와 好古, 好學을 제창했으나, 공자를 계승한 이들은 새로움과 짝을 이루는 ‘옛 것’이 아니라 과거 그 자체만을 중시하게 됐다. 그 결과 ‘옛 것’은 공자의 시대 이전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성인들의 ‘문헌’으로 이해됐다. 공자 사후 오랜 세월, 好古를 말한 공자를 본받아 과거 문헌에 대한 집착과 이상이 계승됐다 공자로부터 계승된 문헌 중심의 역사는 『漢書ㆍ藝文志』에 분명하게 정리됐다. 『한서ㆍ예문지』에 의하면, 문헌은 올바른 大義를 표현하는 심오한 언어[微言]가 담긴 곳이었으나, 공자 사후 분열된 해석과 진위 분쟁으로 어지러워지고 특히 문헌을 증오한 秦의 폭정으로 더더욱 세상에서 유통되지 못한 채 불완전한 모습이었다.

 한 왕조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천하의 서적을 널리 모으기 시작했는데, 한 왕조의 문헌 정리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은 成帝와 哀帝 시절에 활동한 劉向과 劉歆이었다. 각 분야의 문헌을 망라해 교정하고 해제를 붙이던 유향의 작업은, 그의 한 생애에서 마무리되지 못하고 아들 유흠에게로 계승됐다. 애제로부터 王莽 정권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유흠은 학술을 통한 혁신을 꿈꾸었던 학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놓여진 ‘새로움’이란 과거의 것, 즉 옛날의 문헌을 완전히 부정하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 유향의 세대로부터 전수받아온 유구한 전통 문헌학이 이미 체화돼 있었다. 과거의 문헌을 중시하는 전통은 前漢 시기 전체를 걸쳐서 충분히 강조돼 있었다. 이제 그의 눈앞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제창돼야 할 것은 문헌 그 자체의 정리가 아니라, 그 문헌에 대한 재해석이었고, 동시에 그것을 통한 과거의 재해석이었다. 述而不作을 제창한 공자를 계승했던 유학자로서, 유흠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경전에 대한 이전의 해석을 비판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찾는 일이 시급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과거의 것이지만 동시에 당시의 학술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새로운 수단으로서의 古文 필사본 경전들이었다. 당시의 문헌은 주로 隸書라는 서체로 유통됐는데, 예서는 당시의 서체라 하여 今文으로 불리고 그보다 이전의 서체들은 고문으로 불리고 있었다. 유흠은 문헌 연구를 포함한 중국의 전통 학술에서 ‘문자’가 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됐다. 유흠이 제기한 금문과 고문의 문제는 문헌 고증의 학술적인 진위를 둘러싼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문자가 획 하나로 다른 글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중국 문자의 특성에서 보면 새로운 학문 방법론이기도 했다. 문자의 필사를 통한 다시 쓰기는 아주 사소한 필사자의 실수일지라도, 문자의 異同 때문에 재해석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역대로 정치적으로 실패한 유흠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학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대로 계승했다. 특히 그는 문헌 해석과 문자를 관련짓는 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중국 문헌학에서 문자는 새로운 정치 질서와 이상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의 출현, 그리고 과거 중요한 경전의 재해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유흠이 고문경학을 제창하던 시절, 그가 비난했던 금문으로 쓰인 학술은 무엇보다도 문헌이 부정확한 곳에서 신중하지 못하고 사사롭게 해석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았다. 자전이 정리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무렵으로 단순한 식자교재를 넘어서, 과거 문헌인 경전의 재해석을 둘러싼 문헌학적인 학술에 문자학이 봉사하게 됐다. 『한서ㆍ예문지』를 쓴 班固나 『설문해자』를 쓴 許愼 모두, 고문의 학술을 주창해 새로운 학술과 경전의 재해석을 이끌어 한 시대를 흔들었던 점에서 보면 유흠의 후학들이다. 『설문해자』는 그곳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 문자야말로, 모든 학술의 근본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문자는 경예의 근본이며 왕정의 시작이다. 선인들이 그것으로 후대에게 경예와 왕정을 전수하며, 후인들은 그것으로 옛날의 모습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근본이 서야 道가 생겨난다 했으니, 세상의 지극한 이치는 어지럽혀질 수 없음을 알겠다.” 이것은 문자가 문헌에 의지한 학술의 측면을 넘어서, 세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본으로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 분명하게 밝힌 최초의 선언이었다.

염정삼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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