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6:05 (금)
“조선의 몸은 조선인의 것 … 몸의 자주성 선언”
“조선의 몸은 조선인의 것 … 몸의 자주성 선언”
  • 교수신문
  • 승인 2012.11.12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광주일고와 광주학생독립운동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최초 발생지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교내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역사관(사진)과 1954년에 세운 불꽃을 형상화한 39m의 기념탑이 광주광역시문화재(기념물 제26호)로 서 있다(사진 오른쪽 위). 한편 광주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에 기념비를 세운 1959년에는, 1930년 수감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험 백지동맹을 전개했던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에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기념비를 세웠으며, 옛 본관은 2011년 기념역사관이 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는 호남선 나주역과 광주역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철도와 결합한 식민지 근대성이 사회운동의 장소성을 구성하는 최초의 전망을 보여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학생이 조선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긴데서 촉발 됐다. 댕기머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 여인의 ‘몸’, 겁탈 당하는 식민지 조선 자체를 표상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청년학도들이 조선의 몸은 조선인의 것이라고 몸의 자주성을 선언한 사건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는 호남선 나주역과 광주역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철도와 결합한 식민지 근대성이 사회운동의 장소성을 구성하는 최초의 전망을 보여준다. 겁탈 당하는 식민지 조선의 표상 광주는 공간지리적으로 농업과 상업에 바탕을 둔 식민도시들의 배후기지이자 대전-목포간 호남선과 송정리-담양 간 광주선 철도 개설이 생성시킨 교통중심지이며 인적 자원의 집결지였다. 이것은 쌀과 면화 경작에 적합한 영산강 유역 나주, 송정리, 鶴橋 3대 평야에 많은 일본인 영농자가 이주해 일본식민사회가 일찍 형성된 것과 연관 있다. 특히 광주인근에는 호남수탈의 내륙중심지 영산포, 나주, 식민해항도시 목포에 일본인 거주 밀집 지역이 발달했다. 영산포는 일본 상인과 자본가들의 거점이었고 조선인 6천 명에 일본인 800명이 살았던 나주 지역에는 공장 38개 가운데 30개는 일본인 소유였다.

나주, 담양, 영산포에 거주한 일본인 학생들은 교육중심지 광주로 대규모 통학권을 형성했다. 통학생 비율이 광주고보 전교생의 1/6인 70명에 비해 일본인학교 광주중학은 전교생의 1/4인 1백명으로 더 높은 이유가 여기 있다. 이들의 동향은 각 학교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과 충돌가능성이 상존했다. 식민지 생활공간은 ‘이중공간’으로 특색 지워진다. 나주의 일본인들은 본정을 중심으로 토지를 소유하며 일용잡화, 죽공업, 요리점, 식료품, 면포, 농구, 미곡 등 지방 소도시의 기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상행위를 영위했다면, 조선인들은 약간 주변부인 군청과 西門町 사이 이른바 ‘사매기’에서 상권을 형성해 여관, 술집 등 부차적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민족적 격리와 갈등 관계를 보여주었다.

한편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광주로 자녀를 교육 보내는 조선인들은 지역의 경제력을 독점한 일본인과 이해관계 갈등이 예민해질 가능성이 많았다. 1931년 인구 4만2천637(일본인 6천199명, 외국인 325)명이었던 식민지 상업신도시 광주에서는 서문통, 동문통, 남문통에 일본인 상가가 집중한 생활공간의 이중성이 작동했다. 교육공간도 광주고보, 사범학교, 광주여고보와 광주공립농업학교는 조선인 중등학교였고, 광주중학교는 일본인 학교였다. 다만 목포상업학교는 조·일 학생 비율이 같았다.

이중공간성은 제국 시민공간과 식민지 시민공간의 형성에만 그치지 않았다. 식민지 근대화의 수혜공간과 비수혜공간이란 또 다른 이중성은 ‘이중의 이중성’을 작동시켰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또한 ‘조직공간’ 발전의 산물이다. 먼저 1926년 11월 3일 결성해 이듬해 3월 자진해산한, 광주고보생 왕재일과 장재성, 농업학교 박인생 등 광주고보생과 광주농교생 16인으로 결성한 사회과학연구회 醒進會는 광주지역 최초의 학생운동 조직으로 중요하다. 민족해방의 방법으로 반제·반자본을 표방하는 사회주의 이념의 유용성을 인정했던 성진회원들은 다양한 개별적 형식으로 전남사범학교와 광주여고보를 포함한 각 학교에 새로운 사회과학 연구 모임 결성에 참여하고 지도했다. 둘째는 1927~28년 강해석, 지용수 등의 고려공산당 청년회가 적극적으로 각 학교에 독서모임을 지도했으나 1928년 8월 검거됐다.

그 후 전남청년연맹위원장 장석천과 나승규 등이 학생지도를 담당했고 이들은 1929년 11월 3일 학생시위 이후 즉시 제 2차 학생시위를 추진했다. 1929년 후배들의 신망을 받던 장재성이 일본 중앙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 학생 사회과학 모임 조직화에 나서며 9월에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을 맡은 것은 중요한 계기다. 바로 그 장재성을 ‘책임비서’로 독서회 중앙회 아래 다수 소그룹으로 구성된 학교별 독서회가 사회과학연구를 심화시키고 소비조합 결성을 시도했다. 독서회는 곧 해산했으나 그 경험은 유사시 강한 조직력의 기반이 됐다. 11월 3일 광주고보생과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본인 학생 수십명 사이에 역전광장에서 집단난투가 벌어졌고 해산당한 학생 3백여 명이 고보강당에 모였을 때 장재성의 지도로 사후대책을 논의한 배경도 거기에 있다. 고보생들이 농기구실을 열어 장작, 곤봉, 배트 등으로 무장하고 농업학교와 사범학교 학생까지 가세해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며 광주중학교로 행진했을 때 제안자 오쾌일은 나주통학생이며 독서회원이었다.

이것은 1927년 이래로 광주고보와 광주농교에서는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하는 ‘투쟁공간’이 형성돼 일본인 교장의 강압적이고, 열악한 교육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교우회 자치운영을 요구하는 다양한 동맹휴학이 전개됐기에 가능했다. 맹휴주도자들은 조선인 본위의 교육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이란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지속된 맹휴는 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 광주여고보 시위운동의 경험을 축적했다. 사건 발생으로 일제당국의 탄압이 가속화되자 12일에는 장재성의 지도로 독서회원들이 추동해 광주고보와 농업학교 학생들이 ‘구속학생 석방’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성공시켰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운동의 구심체 시위는 나주와 목포로 파급돼 특히 목포상업학교 19일 동조시위는 50여명이 참가해 적색기를 앞세워 중국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지지하는 매우 급진적인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했다. 27일에는 나주에서도 동조시위, 29일에는 영산포에서 맹휴가 전개됐다. 6·10만세 이후 최초의 학생 시가행진과 대규모 학생 검거는 전국적 반향을 불러 일으켜 투쟁공간의 확장을 가져왔다. 서울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중앙청년동맹에서 파견한 권유근과 부건은 전남청년연맹 장석천, 강영석 등과 회담해 시위운동의 전국적 확대에 합의하고, 장석천은 신간회에서 현지조사차 온 허헌, 황상규, 김병로를 만나 전국적 시위운동과 자금지원에 합의해 서울 지역 학생, 사회단체와 연계투쟁 계획을 세웠다.

12월에는 서울, 1930년에는 전국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지지 시위가 전개됐다. 이 운동은 전국 250개교 5만4천 명이 참여했고 26개의 간도한인학교 등 국외학교까지 포함하면 280개교가 참여한 항일운동으로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 미국, 러시아 까지 영향을 끼친 항일 독립만세운동이며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인 ‘피끓는’ 청년학생운동 백년사의 시발점으로서 위상을 확고히 한다.

 

 


장세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ㆍ서양사
필자는 영남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사형제도 비판론의 전개(1760-1795)」, 「1990년대 이후 영국 노동당 정부의 로컬거버넌스 정책」 등이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